마음의 혁명
오늘날은 지식의 혁명, 문화혁명, 과학혁명이라는 말들이 있다. 그러나 시급한 것은 ‘마음의 혁명’이다.
한국 사람들은 참 써서는 안 될 말을 한다.“죽는다...”는 말이다. 배고파 죽겠다. 배불러 죽겠다, 좋아 죽겠다. 보고 싶어 죽겠다 등등.
또 한국 사람만이 쓰는 희한한 말이 있다. “먹는다!?”는 말이다. [나이]를 먹는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욕을 먹는다” 등.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을 먹는다”라는 말이다. 링컨은“인간은 자기가 마음먹은 만큼 (결심한 만큼) 행복해진다”고 말했다.
그러면 과연 마음이란 무엇인가? 생각을 담아놓는 그릇이다. 따라서 무슨 생각을 담아놓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은 나름대로 좋은 것, 나쁜 것, 깨끗한 것, 더러운 것 등등을 담는다.
어떤 스승이 바구니 안에 꽃을 담고 제자들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슨 바구니인가?” 제자들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꽃바구니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스승은 꽃을 들어내고 생선을 바구니에 담고 똑같이 물었다. 제자들은 “생선 바구니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스승은 “맞다. 똑같은 바구니이지만 꽃을 담으면 꽃바구니요, 생선을 담으면 생선바구니이니라. 마찬가지로 [사람]도 마음 안에 쓰레기가 담겨 있으면 쓰레기 같은 사람이지만, 그 안에 향기 나는 꽃이 담겨 있으면 향기 나는 사람이니라.”
그러면 도대체 마음은 생물과학적으로 우리 몸 어디에 있는가? 대체로 [사람들]은 [마음]이 ‘가슴 쪽’을 가리키며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심장’과 연결시킨다. 그러나 [세계적인 과학자나 의학자들]은 “마음은 뇌에 있다”고 말한다. 한국 사람들은 '마음은 가슴에 있다’고 답하지만, 반면에 미국 사람들은 70%이상이 ‘마음은 뇌에 있다’고 대답한다.
동양인은 마음을 따뜻한 감성과 비교하는 반면에 미국인들은 마음을 논리와 비교한다. 우리들은 ‘당신은 마음이 따뜻하다. 당신의 마음은 매우 차서 가까이 가기가 힘들다’라고 은유적으로 마음을 표현하지만, 미국인에게는 ‘마음이 따뜻하다, 차다’라는 직접적인 표현이 드물다.
마음이 ‘뇌의 활동’이라고 했는데,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뇌는 ‘뉴런’이라는 신경세포와 이 신경세포 말단에 ‘시냅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뉴런’과 ‘시냅스’가 작용하는 것이 마음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결국 ‘신경세포들의 조화로운 상호간의 신호전달에 의한 것’이다.
우리가 정신에 문제가 있다. 이상이 있다고 할 때 실제로 우리 뇌 속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정신질환, 흔히 ‘미친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뇌의 신경전달물질 중 도파민이 과잉분비 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뇌]는 환경을 통해 적응해 나간다. [어렸을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어머니의 양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힘들게 보내게 되면 뇌의 조직이 약해지는 것이다. 성인 가운데도 극한 스트레스를 받았거나 충격을 받으면 신경증이 유발한다는 것이다. [정신분열증]나 [신경증]은 ‘약물치료’로도 가능하나 '정신치료’, ‘인지행동 치료’가 더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뇌를 알면]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귀에 의해 귀신들인 사람]은 '기도와 금식’ 외에는 방법이 없다.
[뇌]는 사실 ‘생각을 담아놓는 그릇’이다. [마음]에는 ‘나를 지배하고 있는 힘’이 있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으로 잘 지켜진 마음]에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힘’이 샘솟듯 솟아난다. [마음에서 솟아나는 힘]은 ‘생명을 지탱하는 힘’이 있다.
(잠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이것을 볼 때 [마음]이 ‘우리 몸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생명의 행동]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마음을 잘 지키는가, 아니면 소홀히 버려두는가에 따라 복된 삶이 되는가, 아니면 불행한 삶이 되는가가 결정되는 것이다.
[가인]이나 [가룟 유다]는 마음을 잘 지키지 못함으로 불행을 자초한 사람들이었다.
(잠 23:7)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벼룩]은 방바닥에서 천정까지 뛸 수 있는 점프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벼룩을 병에 담아놓고 뚜껑을 덮어 놓으면 병 안에서 몇 번 뛰어보던 벼룩은 기껏 뛰어야 그의 한계가 병뚜껑인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한참 후 병뚜껑을 열어 놓는다. 이때야말로 천정까지 뛰어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뛰어봐야 병뚜껑인데 하고는 자포자기 하고 만다. [인간]도 벼룩의 훈련을 자신에게 시키고 있다. ‘나는 돈이 없으니까, 배우지 못했으니까, 늙었으니까’ 하는 식으로 먼저 생각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인생]은 생각하는 대로 이뤄지는 것이다. 예로부터 아이들이 배가 아프다고 하면 엄마들은 ‘엄마 손은 약손’하며 배를 문질러주었다. 그러면 얼마 안 있어 아이들은 아팠던 사실을 잊어버리곤 했다. 아프면 병원으로 달려가는 요즘도 이런 엄마 손 효과는 여전하다.
[어떤 사람]은 [엄마 손]에서 나오는 ‘자기장’이나 ‘기’ 때문에 낫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보다는 아파서 긴장된 상태이지만 엄마라는 믿을 수 있는 사람 품에서 편히 쉴 수 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어 병이 낫는 것이다. 이런 엄마 손 효과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시절에나 가능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 가능하다.
[엄마 손의 효과]를 의학적으로 ‘플라보시 효과’라 한다. 실제로는 없는데 있을 것이라고 기대함으로써 나타나는 실제효과인 것이다. ‘프라보시 효과’를 우리말로 ‘위약효과’라고 부른다. 하버드대의 허버트 벤슨 박사는 위약효과가 가짜효과라는 표현을 매우 싫어한다. 실제로 효과가 분명히 있는데, 왜 가짜라고 지칭하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위약]도 효과가 있다는데,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치료하시는데 왜 효과가 없겠는가!
미국 뉴저지 주 러스키대학교 엘렌 아이들러 박사는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는 사람이 오래 산다”고 말했다. 실험적으로 ‘자신의 건강상태’를 최상, 아주 좋음, 양호, 좋지 못함의 단계로 나눠 평가했는데, 자신의 건강상태를 좋지 못하다고 평가한 사람들이 최상으로 평가한 사람들에 비해 4-7년 안에 사망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음]이 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이 건강을 위해 중요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마음 먹은대로 된다]는 말이 맞다!
우리가 살다보면 정말 지켜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건강도, 몸매도 지키고 싶어서 운동도 하고 헬스장도 가고 수영도 하고 조깅하는데 여러 시간을 투자한다. 재산을, 물질을, 재물을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지켜야 할 것]은 ‘마음’이다. 그중 [가장 먼저와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잠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지키기 위해 먼저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읽고 듣는 일에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킨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빼앗기지 말라’는 것이다. [도스토 예프스키]는 말하기를,“성령과 악마가 싸우고 있는데, 이 전쟁터야말로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성령과 마귀가 서로 싸우고 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마음을 자꾸만 흐트려 뜨리고 분산시키려 한다.
[내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사랑]이 '마음'을 주장하고, [내 마음에 미움이 있으면] [미움]이 '마음'을 주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가 주는 나쁜 마음들]이 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음의 문'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이런 나쁜 것이 들어오면] 그것이 내 인격을 주장하고, '내 사고 방식’을 주장하고, ‘나의 모든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므로 그러한 악한 마음이 내 안에 들어오기 전에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치고, 말씀과 기도로 물리쳐서 나쁜 영의 세력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마귀가 나의 마음을 주장하도록 하면 안 된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시도록 해야 한다.
늘 [성령]을 환영하고 모셔야 한다. [우리의 마음의 무대]에 ‘성령’이 활동하도록 내어드려야 한다.
[성령이 마음속에 임하면] ‘변화’가 일어난다. [혁명]이 일어난다. [긍정적인 역사]가 일어난다. 어두움이 밝아지고, 할 수 없던 것도 할 수 있게 된다. ‘불가능’도 가능케 되는 것이다.
이러므로 ‘무릇 지킬만한 것들보다 더욱더 마음을 지켜' 생명력 있는 신앙을 살아가시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