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담임목사 독서보고서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담임목사 0 1405 0
제1장 기독교 교육의 본질적인 문제들


1.기독교 교육의 주체는 누구인가?

기독교 교육의 정의는 과연 무엇일까? 기독교 교육은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다. 창세기 2장에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이 가정의 일원이 되신다. 아담과 하와와 함께 즐겨 거니시기를 원하시며 그들과 대화하기를 원하시며 그들의 낯을 보기를 원하신다(창 3:8).

사랑으로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설계하셨던 사랑의 가정은 인간의 불순종과 사탄 의 계략에 의해 무너졌다. 크리스천 부모는 그 자녀에게 구속의 하나님에 대해 확신있게 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죄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건과 그로 인한 감사와 기쁨을 그 자녀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출 13:14). 예수께서는 가정에 대해 새로운 개념을 형성시키신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치이라 하시더라”(마 12:46-50) 하나님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자녀가 된 자들이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다. ‘참 교사란 무엇이냐? 네가 깨닫게 된, 알게 된 가장 소중한 것을 제자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겠느냐?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고서는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는 것과 같이(마 13:45-46) 이제 네가 생명되는 지식을 알았으니 생명을 네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합당치 않겠느냐’ 는 것이었다.

2.기독교 교육의 적은 누구인가?

창세기 3장부터 그는 정체를 드러낸다. 사탄은 여자에게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도록 가르친다(창 3:1-6).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타락시켜 하나님의 가정을 파괴시켜 버린다.

이 시대에도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를 우상에게 내어 맡기는지 모른다. 물질의 우상에, 문화의 우상 등에 아이들을 내몰고 있으면서도 그 뒤의 사탄의 웃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사탄은 어린아이를 놓지 않으려 한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시 바로는 장정만 가라고 하고 어린아이들은 데리고 가지 못하게 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장정은 만 13세에 성인식을 치른 남자를 말한다. 이 말씀에 비춰볼 때 13세 이전에 성인식을 치른 남자를 말한다. 이 말씀에 비춰볼 때 13세 이전에 신앙 교육을 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자녀들을 사탄에게 내어주게 된다는 의미를 유추해낼 수 있다. 사실 청소년 중기(14세-15세)를 지나면 종교교육의 실효를 거둘수 없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카톨릭의 한 지도자는 이런 말을 했다.

“어린이를 일곱 살이 될 때까지 맡겨주면 그에게 생명을 줄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잃도록 벙어리 되게 하고 귀먹게 하는, 그리하여 거품을 품고 이르 갈며 살아가게 하는 세력에 대해 이제 우리는 눈을 떠야 한다. 어둠의 권세에 대해 정면으로 대적해야 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서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성령의 도구로 쓰이면서 강하게 느낀 것은 날마다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잠시만 방심해도 우는 사자처럼 달려들어 예배를 방해하고 괴롭히는 세력과 부딪쳐야 했다.

3.기독교 교육의 장은 어디인가?

기독교 교육을 교회에만 책임지울 수 없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일 주일에 한 번, 많아야 두세 시간 할애되는 주일학교의 교육으로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에 두고싶다. 일 주일 동안 아이들의 삶 속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커리큘럼이 개발된다 할지라도 학교와 사회에서 그들이 접하는 세속적인 문화나 지식들은 너무나 거센 탁류로 그들을 침몰시키려 한다. 이런 세대를 본받지 않게 하려면 그들의 삶의 터전이 되는 가정이 교육의 장소로 열려져야 한다. 가정은 부모들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이 명령이 구체적으로 실현 될 수 있는 가장 휼륭한 공동체이다. 기독교 교육을 국가에, 학교에, 그리고 이 시대의 사조에 맡기지 말고 가정이 수용해야 한다. 부모들이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어야 하며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를 가정 속에서 즐겨 구원하시고 훈련시키시며 가르치려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는 장소를 하나님은 거룩히 구별하신다. 크리스천의 교육의 장은 곧 하나님의 집이 세워지는 곳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넓혀지는 곳이기도 하다.


제 2장 기독교 교육의 실패 요인들


1. 하나님의 절대 명령에 대한 인식 부족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과 자기 자녀와의 사이에 제사장이 되어야 하고 중재자가 되어야 함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 권위의 상징인 가정에서 하나님이 멸시를 받으시자 하나님은 진노하셨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 2:30). 엘리는 자기 자녀의 행실을 소문을 듣고 나서야 알 정도로 교육에 관심이 없었다. 교육은 치료가 아니라 예방이다. 소문을 듣고 가르치려 할 때는 이미 교육의 시기를 놓친 때이다. 자녀를 바로 가르치지 못한 죄는 하나님의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이며, 개인과 가정과 국가를 망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에리 제사자의 가정을 들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엘리의 자식들은 올바른 가르침을 받지 못해 하나님의 나라를 그르쳤으나 사무엘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게 된다. 교육에 무관심한 것은 가정의 권위를 상실케 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자녀를 대적케 하는 일이며,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깨는 일이다. 기독교 교육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인식이 더욱 분명해져야 함이 디모데전서 3장에 나타나 있다.

2. 교육자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문제

교육자는 언제나 하나님과 자녀(피교육자)의 중간에서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를 맡아 기르며 창대케 하는 임무를 맡은 자로 있어야 하므로 교육자는 사사기의 마노아와 같은 질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다. “마노아가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삿 13:12). “인간의 손으로 인간을 고치려 함은 최악의 잘못이다” 라는 자끄마르땡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가르친다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교육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자녀를 지으신, 그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된 하나님께 그를 데려가는 일이다.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께 인도하고 소개해야 하며 또한 자녀에게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예수님이 자녀들을 축복하심을 믿는 믿음은 매우 중요하다. 자녀에게 축복이 임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들이 제자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다는 데 있다. 기도의 능력을 믿는 부모는 자녀를 예수님께 데려가는 믿음과 함께 가르침에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자신의 나라를 확장시키신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로 가르쳐야 하고 그것을 또 지키게 해야 한다. 크리스천 자녀 교육은 기도와 훈련이 분리되거나 한쪽으로 치중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는 교육의 방법은 무모한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로 가르치려 하지 않는 자세 역시 게으른 종으로 질책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움직이신다. 기도하는 자에게 지혜와 명철을 주셔서 가르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를 가르칠 자질을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묻어두어서는 안된다.

3. 잘못된 교육의 조류에의 편승

(1)위장된 사랑관 방임주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자유라는 이름 아래 지나친 방임주의와 관대가 교육을 침몰시켜 갔다. 사람과 제재의 조화를 무너뜨린 이 풍조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가르칠 의무를 최소한으로 줄여 놓았고 징계를 무조건 해롭고 부당한 것으로, 때로는 무식한 것으로까지 몰아붙였다.

사랑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 부모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 사랑은 변질된 것이다. 가르치지 않는 무조건의 사랑은 자제력을 상실케 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아이로 키우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육의 풍조 속에서 칭찬만이 최고의 교육 효과인 양건론되나 칭찬의 방법이 기술적으로 교육에 쓰이지 못하는 무지한 경우가 많다.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교육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눈물의 기도와 끝없는 연구가 되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교육이다. 자녀에게 때로 엄하게 대해야 할 때가 있다. 사랑이란 위장된 이름 때문에, 때로는 자기의 아픔이 두려워서, 귀찮아서, 그때를 놓친다면 자녀는 죄악을 다스릴 지혜를 배우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2)물질과 시간 속의 사탄의 계략

교묘히 위장된 사랑과 자유주의가 교육을 혼미한 환각 상태에 머물게 하듯이 물질의 풍요와 시간의 위축으로 사탄은 부모의 권위를 박탈해 가고 자녀들을 물질 풍요의 우상의 팔에 안기우게 한다. 사탄은 물질을 끝까지 담보로 잡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자녀와 함께 하고 가르쳐야 할 시간을 매장시키며 사탄은 교육을 물질에게 맡기도록 부모를 유혹한다. 교육은 특히 사람에 대해 인내하는 오래 참음을 요구하므로 교육의 관심을 아예 편한 쪽으로 기울여 버린다. 하나의 행동 수정을 위해 오래 인내해야 하는 것이 교육이다. 교육은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인내의 싸움일 수도 있다. 요즘 부모나 교사들은 편안하기를 원하며 앞에 보이는 포기의 휜 깃발을 든다. 사탄은 크리스천 교사나 부모들의 시간을 달콤한 물질을 내놓고 훔쳐간다.

(3)교사를 위축시키는 부분들

첫째는, 어머니들에게 자식을 위해,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둘째로, 교육에 있어서 매우 당연한 이이며 마땅히 그래야 할 일인본을 보이라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교사나 부모의 말대로 행하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을 모방한다. 그러므로 교육자들이 피교육자들의 본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에 묘한 함정도 있으므로 이를 극복해야 한다. 크리스천 교사나 부모들은 피교육자들에게 본을 보이려 하기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교육자로서 자격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을 교육의 장에 초대하여 먼저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셋째로, 기독교 교육이 학교형 교육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교육이 독창적인 노선에 있지 않고 수업 형태를 모방하고 있다. 기독교 교육의 매체나 수단으로서의 학교교육의 지식 교수형을 추종하고 있다고 본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는데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관해서’ 가르치는 것으로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성경지식이나 도덕적인 구범 등이 주입됨으로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데 오히려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 3장 어린이를 보는 관점


1. 세상 속의 어린이

“너희 집 얼마짜리니?” “너희 차 얼마짜리냐?” 어린이들도 돈을 사랑한다. 그리고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한다. 노느 시간이면 학교 전화통 앞에 줄을 서서 부모에게 명령을 한다. “엄마, 그 준비물 왜 안넣었어, 빨리 가지고 와!” 부모는 땀을 흘리며 준비물을 대령한다. 아이는 감사하기는 커녕 눈을 흘기며 빼앗듯 준비물을 갖고 교실로 들어가 버린다. 어린이들은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납다.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뛰고 춤추고 흔든다.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른들이 이맛살을 찌푸리든 말든 어린이들은 디모데 후서의 인간상 속에 자신을 흡수시킨다. 이것이 세상 속의 어린이의 모습인 것이다.

2. 성경속의 어린이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죄악 속에 죽은자로 보지 않으시고 깨어날 수 있는 잠자는 자로 보시고 생명의 가능성 과 천국에의 믿음에 대한 소망적인 존재로 보셨다(마 9:18-26).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신 그 분의 앞 뒤에서 기뻐 뛰며 “호산나 다위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 21:9). 하며 찬미의 소리를 지른 것은 어린아이들이었다. 예수님은 천국과 어린아이들을 연결시키시기를 즐겨하셨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자의 것이니라 하시고”(마 19:14).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의 커다란 가능성을 어린이에 게 두셨던 것이다.


제 4장 부모와 교사의 헌신에의 각오


1. 교육의 중요성에 관한 인식과 각오

크리스천의 자녀 교육은 부모나 교사의 교육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실감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절대명령이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주님의 일이라는 자각이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가해지는 교육에 대한 압력을 무겁게 느껴야 하며 피할 수 없는 크리스천의 사명임을 느껴야 한다. 교육에 대한 열망은 인간의 어떤 각오나 결단보다도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순종의 차원으로서 응답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역자로서 손을 잡는 일인 것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영적 투쟁이며 땀 흘리는 헌신이며 눈물의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크리스천 부모들은 자녀 교육을 삶의 최대의 목표로 삼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자신을 도구로 드리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신 29:4)를 원하시고 훈련을 준비시키신다.

2.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준비

먼저 기도의 시간을 드려야 한다. 그것은 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소에 성령을 초대하는 것이며 성령께 가르침을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겸손히 범사에 그분을 인정할 때 그분은 기뻐하신다. 성령이 우리를 그의 일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교육의 장에 자리를 잡으시며 가르치시기 시작하신다. 둘째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성령의 교과서는 경경이다. 성경이 없으면 그분은 일하실 수 없다. 하나님의 뜻대로 그 자녀를 키루는 모든 지침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교사의 발길을 인도하는 등불은 성경뿐이다. 그것이 곧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된다. 말씀은 생명의 젓이다. 크리스천의 자녀들을 키울 수 있는 양식은 말씀의 젓이다. 부모나 교사의 내부에서 곰삭도록 되새김질 되어 나온 말씀의 젖으로 자녀는 성장한다. 즉 하나님의 자녀를 번성시키시기 위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선택이 나로까지 이어 졌음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깨달음은 연구함을 동반한다. 우리는 이따금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만으로도 가르치는 준비를 끝내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배우는 자세로 있는 사람만이 남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교육의 동역자를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육의 동역자로 삼으셨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일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의 자녀들도 함께 연합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모세에게는 아론과 훌 이라는 기도 동역자가 있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다가 낙심이 될 때 피곤할 때 서로가 서로의 손을 붙들어 줄 수 있는 동역이 필요한 것이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6-7).


제 5장 기독교 교육의 내용 (P 81-87)


1.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참 교육을 인간을 행복하게 할 책임을 갖는다. 인간의 행복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나와 너와 우리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교육은 나를 다스릴 수 있는 가르침,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나와 자연과의 관계 속에 화목을 이루어 나가는 실존적인 문제에 부딪쳐야 한다. 관계 속에서 자아를 탐색하고 향상시키며 타인과 화평 하는 자가 되고 하나님을 알고 자연을 다스리는 문제야말로 인간 행복의 샘물을 찾아내는 것이다. 참된 행복의 의미를 알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다. 사랑하는 법과 사랑하는 법은 크리스천 교육의 기본이 된다. 사랑으로 이 사회를 개혁시킬 인물을 준비시키는 일이 이 시대의 부모들과 교사들의 사명인 것이다.

2.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기독교 교육의 교사나 부모는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만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보이는 것과 결합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시기 위해 보이는 것부터 가르치라는 접근법을 시도토록 하셨던 것이다. 유월절 제사 의식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치신 후 그 의식을 행하는 것을 보며 그들의 자녀가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고 하거든(출12:26-27) 그 보이는 의식을 통해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르치라고 하신다.

주위에서 눈에 띄는 보이는 것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예수님의 교수법이기도 하다. 어린아이를 보게 하시므로 천국을 가르치시고, 연보궤에 생활비를 넣는 여인을 보시고 헌신을 가르치시기도 한다. 씨뿌리는 농부를 보게 하시고 사람의 마음을 보게도 하신다. 성경속에 많은 인물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어려운 체험을 거치기도 한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보는 것들을 통해 믿고 경험하고 증거하고 기도함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제 6장 하나님과 나 (P91-130)


1. 단순성

크리스천 교육자들은 먼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 교육은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인데 어른으로 있으면 어린아이들이 마음을 열어 친구가 되려 하지 않는다. 어린이는 친구를 좋아하지 지도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이가 가지고 있는 단순성을 격려하고 기뻐해 주는 어릿광대를 닮은 교육자가 필요하다. 어린이는 단순하다. 얘야,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신 단다. 또 기도를 어렵게 가르치거나 간섭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말로 할 때 어린이는 솔직하게 기도한다. 기도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은 단순히 믿는 아이들과 즐겨 생활하시며, 그러한 아이들 속에서 “살아계신 참 좋으신 하나님” 이름으로 나타나시기를 기뻐하신다.

2. 상상력

어린이가 가진 풍성한 하늘의 성품 중 하나가 상상력이다. 우주의 신비와 신의 섭리와 역사의 운행에 대한 지식은 작은 어린이의 상상력 속에서 시작된다. 정감 어린 목소리로 부모가 들려주는 동화로 어린이들의 상상에 날개를 돋게 해 주고, 어린이들의 상상한 내용을 귀 기울려 들어주는 일 등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일지라도, 헛된 시간을 보내는 일 같아도 인내하며 들어주는 일은 필요하다. 우리 어린이들의 상상력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일에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한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교육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교육자에게 먼저 놀라운 상상력을 믿음으로 주실 것이다.

3. 순종심

순종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초점이며, 사랑의 표현이다. 타고난 죄 된 본성이 어린이의 마음 속에서 활동하고 있을 지라도 본래 심히 좋은 존재로 지어졌고, 그리스도의 관계가 어린이들 안에 숨겨져 있으므로 자신이 불순종 할 때 어린이는 욕구 불만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어린이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데서부터 배운다. 그리고 이 말씀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행동에 대한 결정자는 부모라는 것이다. 판단이나 결정의 책임은 부모에게 있고, 자녀는 순종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사나 부모는 권위를 가지고 자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유태인 부모들은 자녀 앞에서 철저히 권위를 주장한다고 한다. 유태인 부모들은 어른과 아이들이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어린이에게 인식시킴으로서 아이들이 어른 세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그것으로 부모의 권한에 대한 책임과 가정의 질서를 유지시킨다고 한다. 부모는 권위를 갖고 행동규범을 확실히 가르쳐야 하며, 그 약속을 어겼을 때는 징계를 받아야 함을 알려야 한다. 부모는 한번 세운 규칙에 대해서 일관된 행동을 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순종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의의 종이 되느냐, 죄의 종이 되느냐, 두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유난히 아이들이 순종치 않을 때는 분명히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살펴보아야 한다.


제 7장 나와 나 (P 133-216)


1. 자기애

사랑을 회복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고백을 드린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26:39). 여기서 예수님은 ‘자기애’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시사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떠한 뜻이라도 다 수용하며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남을 사랑할 수도, 가르칠 수도 없다. 자신을 바르게 사랑하는 사람만이 건전한 사고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 교육자들은 우선 자신을 참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점검해볼 일이며, 자기애에 대한 바른 개념이 정립되어 있는지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자기애를 이기심으로 오해하여 육신에 속한 일로 치부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진정한 자기애는 하나님과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만 온전히 성취된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곧 자신의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얘야, 나는 너를 위해 죽었단다.”고 했을 때, “왜 나 같은 것을 위해 죽어요?”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행은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자애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죄인들의 대속물로 내어 놓을 때의 모습에서 참된 자기애가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타인을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만 자기애를 실현할 수 있으며, 행복할 수 있다. 자기애는 관계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므로 인간의 자기애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나 남이 나를 대하는 말씨나 태도에서, 그리고 그러한 외부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 자세에서부터 온다. 그러므로 교육자는 피교육자에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귀한 자임을 알게 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를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이며, 하나님 안에서 삶의 목표가 있는 자로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야 하는 존귀하며, ‘너’또한 그러하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자로서 우리가 온 곳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가야 할 곳도 그분이 계신 곳이라는 실존적인 문제를 어려서부터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인간이 영, 혼, 육으로 되어 있다고 하면서도 영적인 가르침에 더 치중하는 것을 크리스천의 교육인 양 오해는 것이다. 영, 혼, 육이 고루 성장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한다. 자신을 소중한 존재로 여겨 사랑하도록 하려면 자기 자신의 영, 혼, 육을 돌보는 데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함을 가르쳐야 한다. 크리스천 자녀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정숙한 몸가짐을 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또한 건강을 잘 지키도록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길러줘야 하는 것도 부모의 큰 일 중에 하나이다. 육신이 건강하지 못하면 자신을 사랑하기 어렵다. 건강한 청지기로서 지혜로운 삶을 살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도 기뻐하실 일이다. 크리스천 교육자들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는데 그 기본은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는 것이다. 성전된 몸을 정결하게 지킬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2. 꿈의 실현

꿈을 이루는 노정에서는 반드시 어려움을 만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값진 삶은 반드시 값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도록 가르쳐야 한다. 많은 어린이들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땀흘림 없이 쉽게 얻어진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물질을 요구할 때마다 풍성히 안겨주는 부모의 잘못 때문이다. 원하는 물건을 사 줄 때도 그냥 사 주는 법이 없다. 무언가 일을 시켜서 그 일의 대가로 준다. 한 사람이 고통 속에 훈련을 받음으로 여러 사람을 유익하게 할 수 있도록 키워야만 한다. 자녀들이 종이 자세로 삶을 살아가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 크리스천은 결코 안일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이기심에서 탈피하는 꿈을 실현시키려면 남을 섬기는 훈련을 어렸을 때부터 시켜야 하는 것이다. 성실성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꿈은 헛된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크리스천의 자녀들은 세상 속에서 훈련받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 의존하는 자는 승리하게 되어 있다. 큰 꿈을 꾸는 자는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어려서부터 마음 깊이 뿌리내리도록 교육되어진 자들이며, 기도의 훈련을 받은 자들이다. 자녀들에게 꿈의 성취를 위해선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과 기도 역시 시간과 노력과 마음을 다하는 성실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꿈과 동행하는 것은 성실이며, 꿈을 통과하는 열쇠는 고난이다. 아무리 선하고, 크고, 높은 꿈이라도 성실이 따르지 않으면 세월을 헛되게 보내는 악한 종이 되는 것이다. 큰 꿈을 이루는 계단은 작은 성실에서부터 시작된다. 야곱의 경우도, 요셉의 경우도, 남의 종살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작은 일에 성실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한다. 하나님은 작은 충성하는 자에게 큰 것을 맡기신다는 걸 어린이들이 알게 해야 한다, 성실은 손이 하는 일과 연결된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 중 ‘네 손이 하는 일’에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 많다. 작은 성실을 하나님은 즐겨 기억하신다. 성실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가 없다. 성실히 일하되 즐겨 감사와 기쁨으로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일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 앞에서 성실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성실한 사람이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 꾸준히 기도하는 성실로 사자굴 속으로 살아남는 기적을 삶 속에서 체험한다. 어린이들에게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루는 버릇을 길러주는 것은 중요하다. 하기 싫은 일을 먼저 하고, 나머지 시간을 자유롭게 보내는 기쁨을 누리는 습관을 들이도록 훈련해야 한다. 심리학자이며 교육학자인 제임스 도브슨은 이렇게 말했다. “유년시기에는 근면과 훈련으로 양육되어야 한다. 이기적인 생각, 욕심, 참지 못하는 성미, 그리고 무책임의 꽃을 ‘어린이의 자유’하는 미명하에 마음껏 피우게 해서는 안 된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성실이나 책임을 바르게 완수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하나님께 순간마다 도움을 청하도록 가르치는 일이다. 모든 일을 하기 전에 기도하는 습관과 일을 하고 난 후에 감사하는 기도를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실과 책임감을 키우는 준비 학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의 준비 기간인 인내도 반드시 필요하다.

3. 자신감

인간 행동의 동력은 자신감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은 복받을 자로, 땅에 충만한 자로, 땅을 정복할 자로, 다스리는 자로 자신감에 넘쳐 살게 되어 있었다(창 1:27-28). 그러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자 인간은 수치를 알고 자기 자신 안에 숨어 버렸다(창3:7-10). 어린이들 교육에 있어서 자신감은 교육의 동기유발이 된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는 ‘하려고 하느냐’‘하지 않으려고 하느냐’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희망을 가능케하는 부모는 자녀들 자신이 자기의 성장 능력을 믿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자녀의 성장 능력을 믿어야 한다”는 말을 크라인 벨의 「성장 상담학」에 나오는 말이다. 크리스천의 자녀들이 학문과 재주와 지식에 통달할 수 있도록 부모나 교사들은 준비시켜야 한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신의 백성을 통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넓혀가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할 때 부모나 교사는 자신감을 북돋아 주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공했었던 일을 상기 시켜주고 일은 작은 일부터, 쉬운 일부터 조금씩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 메뚜기처럼 뛰지 말고 한 숟갈 한 숟갈 밥을 먹듯 일을 처리해 나가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릇된 행동을 고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오늘 하루만 고치자’‘지금 한 시간만 고치자’하는 식으로 수정해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 자녀의 자신감은 하나님이나 부모와 같은 든든한 보호자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의식에서부터 출발한다. 자녀에게 부모로서의 권위를 보일 때 오히려 자녀들은 안심한다. 모든 문제의 해결점은 여호와께 있다는 선포이다.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는 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인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는 믿음이 자신감의 근원인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기뻐하신다. 그래서 나를 인도하시고 그것을 나에게 주신다.’는 것이 자신감의 전부이다. 이런 선포를 할 수 있는 자는 어떠한 과정 속에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는 삶, 그것이 자신감을 증대시킨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믿는 자가 자신감이 없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요, 믿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결코 삶 속에서 하나님의 기적은 체험하여 살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살게 되는 것이다.

5. 창의력

모든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은 지혜이며 창의력이다. 어린이들에게 창의력을 키워주려면 먼저 부모나 교사가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 자신들에게 허용된 공간과 시간을 창의적으로 연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여인들이 착각을 범하며 산다. 연극 배우나 무대인 가정이라는 공간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부모들이 꾸며가는 분위기 속에서, 부모의 언어 속에서, 그들이 제공하는 자료 속에서 창의성을 배운다. 그러므로 교사나 부모는 창의적인 예술성을 발휘해야 한다. 교육자는 생활 속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자료들에 대해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 창의력 지도는 어린이가 갖고 있는 것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며 그 가지고 있는 재능을 재창조하여 만 배로 확대시켜 남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다. 창의력은 어려운 환경에서 오히려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창의력을 가진 사람은 어려움을 역전시키는 능력을, 기술을 갖고 있다는 예를 어린이들에게 들려줘야 한다. 사물에 대해 호기심은 갖도록 유도하고 관찰하는 태도를 길러주는 것은 중요하다. 어린이가 무엇엔가 관심을 갖도록 하려면 교육자가 질문을 하는 습관을 가져 어린이 역시 사물을 대할 때, 책을 읽을 때, 이야기를 들을 때 질문을 해보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책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책에서 질문을 얻는 것이다.’하는 말은 음미해 볼 만한 의미가 있다. 질문은 배움을 좀더 주관적이게 하고 적극적이게 한다. 융통성 있는 웃음이 없는 사람은 창의성을 갖지 못한다. 상식을 벗어난 웃음의 자유 분방함이 두뇌를 창의적으로 단련시키는 것이다. 놀이를 하면서 어린이들의 창의력은 신장된다. 놀이지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어른과 함께 놀이를 창조해보는 일은 즐기면서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탄력성을 준다. 교사나 부모는 정보에 빨라야 한다. 좋은 비디오 테이프 선정해 주거나 좋은 책을 선정해 주는 데도 민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준은 성경이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언어는 창조의 능력이 있다. 인간은 자기의 언어에 의하여 창조된 실재의 이미지에 의해 산다고 한다. 언어는 단순한 사상 전달이상의 것이다. 사람을 위하여 실재를 존재케 하며 그 사람의 우주에게 질서와 형태를 부여한다.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에 족하며”(잠12:14).

크리스천 교육자들은 문화와 사회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시켜야 할 책임 앞에 눈을 떠야 한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릴 본분을 다 할 수 있는 창의력 신장에 전력을 추구해야 할 때인 것이다.


제 8장 나와 너 (P 219-270)


1. 사랑

하나님께 대한 온전하고 참된 사랑은 이웃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을 요구한다. 크리스천의 모든 행동의 근원은 사랑에서부터 시작되어야하고 사랑은 성취되어야 의미가 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므로 영원하고 온전하며 모든 은사들뿐만 아니라 믿음과 소망보다 더 위대하다. 사랑은 자기 희생과 남의 유익을 위한 행동인 것이다. 사랑은 주는 행위이므로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남을 위해 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채워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셨다. 자기를 부인할 때 자신이 실현되는 구체적인 행위에 의한 열매인 것이다. 인간의 첫 만남은 가정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자녀는 가정에서 사랑을 배우게 된다. 부모와의 관계가 모든 인간 관계의 기초가 된다. 자녀를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려면 어려서 사랑을 흠뻑 받도록 해야한다. 사랑과 징계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사랑은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인내하는 것이다. 교육은 오랜 세월을 자신의 자녀에 대해 인내함으로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자녀의 약함을 인정해 주는 일은 부모의 자존심을 버리는 아픔도 감내해야 한다. 주어서 행복한 삶이 모든 부모들의 삶일 것이다. 사랑은 창조다. 사랑은 아낌없이 줄 기회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자녀의 모든 것을 참아주며 믿어주며 기대해 주며 견디어 내는 것이다.,,,자녀 교육은 듣는데서 10%, 보는데서 50%, 실제로 말해보는데서 70%, 실제 행동으로 옮겨보는데서 90%가 획득된다고 한다. 특히 사랑에 대한 교육은 그러하다. 책을 읽고나서 저는 늘 제가 자녀 교육에 있어서 부족함을 시인하면서 아이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교육에 대한 서적들을 봅니다. 이 책 또한 학교 교사로서 교단에 서신 선생님께서 크리스천 부모들이 부모로서 책임을 다 하지 못한다고 실날 하게 비판을 하고 부모가 자녀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부모는 자녀의 교육을 위하여 죽도록 헌신하며 사랑으로 양육해야 한다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자기 자녀들의 행실을 소문을 듣고서야 알 정도로 교육에 관심이 없었다. 부모가 자녀의 교육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자녀는 절대로 바른 길로 갈수 없다는 것을 성경에서도 보여주듯이 자녀를 바로 가르치지 못한 죄는 하나님의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필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자녀에게 관심을 갖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교육하기 위하여 날마다 애쓰면서도 바쁘다는 이유로 신경을 쓰지 못하고 그냥 지니칠 때도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 원칙을 정해놓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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