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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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8 17:13
.,,,덩샤오핑은 중국의 오늘을 만든 사람이다.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8월 22일)을 맞아 번역·소개된 이 책은 중국 쓰촨(四川)의 농촌에서 태어난 시골뜨기 소년이 13억 인민을 거느린 대륙의 지도자로 서기까지의 세월은 20세기 중국사 그 자체다. 그는 고립주의와 비밀주의 속에 잠자던 대국을 10여년 만에 세계경제에 편입시켜 승천하는 용으로 끌어올렸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늙은 도살자’로
그를 비난하던 목소리는 오늘날 중국의 번영을 칭송하는 소리에 묻혀 버렸다.
홍위병: “당신은 자본주의 노선 추종자인가?”
류사오지(劉少奇): “아니다.”
덩샤오핑(鄧小平): “그렇다.”
문화대혁명이 터진 이듬해인 1967년 8월 5일, 중국 베이징 시내의 관공서 거리인 중난하이(中南海)에서 류사오지와 덩샤오핑에 대한 홍위병들의 인민재판이 열렸다. 두 사람에게는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주자파란 혐의가 씌워졌다.
류는 억울함을 강조하며 완강히 부인했고, 덩은 비굴하도록 죄인임을 자처했다. 홍위병의 분노를 산 국가주석 류는 뭇매를 맞았고, 마오쩌둥(毛澤東)의 미움을 산 끝에 2년 뒤 허무한 죽음을 맞는다.
반면 치욕을 견디며 문혁의 광풍에서 목숨을 건진 덩은 훗날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올라 실용주의 노선을 중국에 뿌리내린다. 책 속에 소개된 이 일화는 마오가 주도하는 정국을 읽고 생존에 성공한 덩의 빼어난 감각을 보여준다.
덩샤오핑은 1904년 쓰촨 성 광안 현의 작은 농촌에서 태어나 1920년 열여섯 살의 나이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대전 후 공황에 시달리던 프랑스에서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워 공장 노동자가 된 덩샤오핑은 중국공산청년동맹 프랑스 지부에 가입하고, 훗날 혁명의 동지이자 경쟁자가 되는 저우언라이(周恩來), 리리싼(李立三), 차이허썬(蔡和森) 등과 함께 공산주의 이론에 빠져든다.
청년동맹 기관지 《적광(赤光)》을 만들면서 충실한 공산주의자로 다시 태어난 덩샤오핑은 이윽고 러시아로 건너가 직업 혁명가로 변신하며, 1927년 중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그 후 대장정과 항일 투쟁을 거치면서 덩샤오핑은 군인이 아닌 조직가이자 홍군(紅軍) 내에 얼마 되지 않는 엘리트 관료로 마오쩌둥의 신임을 받게 되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공산당 서남국 총서기가 되어 연고지인 중국 남서부에서 세력 기반을 다지기에 이른다.
마오쩌둥의 충성스런 지지자였던 덩샤오핑이었지만, 1950년대 말 대약진 운동이 실패하여 3천만 명이 굶어죽는 참상 앞에 환상에서 깨어나 결별을 결심하고 "노란색이든 흰색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라는 유명한 말로 실용주의 노선을 천명한다. 이때부터 최고 권력자 마오쩌둥의 눈 밖에 난 덩샤오핑은 문화 대혁명 당시 마오의 추종자들에게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로 쏠리는 자)’라고 비판당하며 여러 번 숙청의 위기에 몰렸다. 공식 지위를 박탈당하고 트랙터 공장으로 쫓겨나는가 하면, 1976년 4인방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자택에 연금되기도 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군부를 등에 업은 화궈펑(華國鋒) 세력의 도움으로 복귀하였고, 그로부터 당 중앙 부주석, 국무원 제1부총리, 군사위원회 부주석,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등 모든 지위를 찾고 실질적으로 중국을 이끌어 나가게 된다. 모두가 덩샤오핑이 마오의 뒤를 이어 국가 주석에 오르리라고 예상했지만, 그는 1997년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를 거부하고 한 계단 아래에서 실력을 행사했다.
군인 출신 거물이 즐비한 중국 공산당에서 문관 출신 덩샤오핑이 최후의 승자가 된 비결은 바로 철저한 실용주의와 비상한 정치 감각에 있었다. 덩샤오핑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위대한 인물이나 지난 세기의 사람들이므로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로, 중국의 국체인 공산주의마저 철저히 실용적 관점에서 바라본 인물이었다. 명목상의 지위가 아닌 실제 권력에 집중한 덩샤오핑은 언제든지 자기 세력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인민해방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1989년 천안문 사태 때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도록 허가한 것은 당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 냉혹한 면모도 보였다. 당시 동유럽 공산 정권이 줄줄이 붕괴되는 상황에 어떤 일이 있어도 정권을 지켜야 한다는 덩샤오핑의 결의가 그러한 참극을 불렀던 것이다.
저자는 덩의 정치적 리더십을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철저한 실용주의였다고 단정한다. 덩은 마오의 사망 후 화궈펑(華國鋒)을 몰아내고 최고 권력을 쥐었지만 이름뿐인 국가주석 자리에는 끝내 오르지 않았다.
경제 문제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위대한 인물이나 지난 세기 사람이므로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갈파했다.
서방세계가 1989년 천안문광장에서의 유혈사태에 대해 항의하자 “이 상황을 타개하고 여전히 국가를 통제할 수 있다면 그들은 내게 돌아오게 마련”이라는 냉혹하고도 정확한 분석을 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덩의 공과 과를 객관적으로 짚어내고 있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든 자기모순, 정치적 경쟁자를 누르기 위해 마오에 아부했던 1950년대의 행태, 인권탄압 등의 어두운 면과, 가택연금과 숙청의 칼바람을 맞아 좌절하지 않고 때를 기다린 인내, 개혁과 개방으로 재도약의 토대를 마련한 리더십 같은 밝은 면이 교차된다.,,,.
그를 비난하던 목소리는 오늘날 중국의 번영을 칭송하는 소리에 묻혀 버렸다.
홍위병: “당신은 자본주의 노선 추종자인가?”
류사오지(劉少奇): “아니다.”
덩샤오핑(鄧小平): “그렇다.”
문화대혁명이 터진 이듬해인 1967년 8월 5일, 중국 베이징 시내의 관공서 거리인 중난하이(中南海)에서 류사오지와 덩샤오핑에 대한 홍위병들의 인민재판이 열렸다. 두 사람에게는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주자파란 혐의가 씌워졌다.
류는 억울함을 강조하며 완강히 부인했고, 덩은 비굴하도록 죄인임을 자처했다. 홍위병의 분노를 산 국가주석 류는 뭇매를 맞았고, 마오쩌둥(毛澤東)의 미움을 산 끝에 2년 뒤 허무한 죽음을 맞는다.
반면 치욕을 견디며 문혁의 광풍에서 목숨을 건진 덩은 훗날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올라 실용주의 노선을 중국에 뿌리내린다. 책 속에 소개된 이 일화는 마오가 주도하는 정국을 읽고 생존에 성공한 덩의 빼어난 감각을 보여준다.
덩샤오핑은 1904년 쓰촨 성 광안 현의 작은 농촌에서 태어나 1920년 열여섯 살의 나이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대전 후 공황에 시달리던 프랑스에서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워 공장 노동자가 된 덩샤오핑은 중국공산청년동맹 프랑스 지부에 가입하고, 훗날 혁명의 동지이자 경쟁자가 되는 저우언라이(周恩來), 리리싼(李立三), 차이허썬(蔡和森) 등과 함께 공산주의 이론에 빠져든다.
청년동맹 기관지 《적광(赤光)》을 만들면서 충실한 공산주의자로 다시 태어난 덩샤오핑은 이윽고 러시아로 건너가 직업 혁명가로 변신하며, 1927년 중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그 후 대장정과 항일 투쟁을 거치면서 덩샤오핑은 군인이 아닌 조직가이자 홍군(紅軍) 내에 얼마 되지 않는 엘리트 관료로 마오쩌둥의 신임을 받게 되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공산당 서남국 총서기가 되어 연고지인 중국 남서부에서 세력 기반을 다지기에 이른다.
마오쩌둥의 충성스런 지지자였던 덩샤오핑이었지만, 1950년대 말 대약진 운동이 실패하여 3천만 명이 굶어죽는 참상 앞에 환상에서 깨어나 결별을 결심하고 "노란색이든 흰색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라는 유명한 말로 실용주의 노선을 천명한다. 이때부터 최고 권력자 마오쩌둥의 눈 밖에 난 덩샤오핑은 문화 대혁명 당시 마오의 추종자들에게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로 쏠리는 자)’라고 비판당하며 여러 번 숙청의 위기에 몰렸다. 공식 지위를 박탈당하고 트랙터 공장으로 쫓겨나는가 하면, 1976년 4인방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자택에 연금되기도 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군부를 등에 업은 화궈펑(華國鋒) 세력의 도움으로 복귀하였고, 그로부터 당 중앙 부주석, 국무원 제1부총리, 군사위원회 부주석,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등 모든 지위를 찾고 실질적으로 중국을 이끌어 나가게 된다. 모두가 덩샤오핑이 마오의 뒤를 이어 국가 주석에 오르리라고 예상했지만, 그는 1997년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를 거부하고 한 계단 아래에서 실력을 행사했다.
군인 출신 거물이 즐비한 중국 공산당에서 문관 출신 덩샤오핑이 최후의 승자가 된 비결은 바로 철저한 실용주의와 비상한 정치 감각에 있었다. 덩샤오핑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위대한 인물이나 지난 세기의 사람들이므로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로, 중국의 국체인 공산주의마저 철저히 실용적 관점에서 바라본 인물이었다. 명목상의 지위가 아닌 실제 권력에 집중한 덩샤오핑은 언제든지 자기 세력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인민해방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1989년 천안문 사태 때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도록 허가한 것은 당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 냉혹한 면모도 보였다. 당시 동유럽 공산 정권이 줄줄이 붕괴되는 상황에 어떤 일이 있어도 정권을 지켜야 한다는 덩샤오핑의 결의가 그러한 참극을 불렀던 것이다.
저자는 덩의 정치적 리더십을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철저한 실용주의였다고 단정한다. 덩은 마오의 사망 후 화궈펑(華國鋒)을 몰아내고 최고 권력을 쥐었지만 이름뿐인 국가주석 자리에는 끝내 오르지 않았다.
경제 문제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위대한 인물이나 지난 세기 사람이므로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갈파했다.
서방세계가 1989년 천안문광장에서의 유혈사태에 대해 항의하자 “이 상황을 타개하고 여전히 국가를 통제할 수 있다면 그들은 내게 돌아오게 마련”이라는 냉혹하고도 정확한 분석을 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덩의 공과 과를 객관적으로 짚어내고 있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든 자기모순, 정치적 경쟁자를 누르기 위해 마오에 아부했던 1950년대의 행태, 인권탄압 등의 어두운 면과, 가택연금과 숙청의 칼바람을 맞아 좌절하지 않고 때를 기다린 인내, 개혁과 개방으로 재도약의 토대를 마련한 리더십 같은 밝은 면이 교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