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어거스틴의 고백론 (上)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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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8 17:49
서론
어거스틴은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세계사에 기록된 교회 역사에 힘 있게 기록되어진 인물이다. 그는 고백록을 통하여 16년 동안의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회개와 은혜의 차원에서 써나갔다. 그리고 43세의 현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영광을 돌리는 고백을 하였다. 이 고백록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의 내면의 세계는 곧 우리의 내면의 세계와 같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고백록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 그리고 한 단계 하나님 곁으로 다가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나에게는 조금 벅차고 난해한 책임을 알면서도 읽게 된 것은 오직 나의 신앙이 좀 더 성숙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본론
제 1 권 어린 시절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시편 145편 3절,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로 시작한다.
자기의 죄악을 가지고 다니는 자가, 한줌 피조물에 불과한 자가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나이다.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당신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나라는 존재 또한 당신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 사실이나이다. 로마서 11장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니이다.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시나이다.
당신은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않으셨으나 마치 빚을 지신 것처럼 갚아 주시나이다. 또한 빚을 탕감해 주실 때에도 당신은 아무 손해를 입지 않으셨나이다.
당신은 나의 무엇이 되시나이까? 시편 35편 3절,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그러나 내 영혼의 집은 당신이 들어오시기에 좁고 더러우므로 당신이 계시기에는 너무도 부족하나이다. 시편 32편 5절, “주께 내 죄를 아뢰었더니 곧 주께서 내 마음의 악을 사하여 주시지 않았나이까”
당신은 나를 부모에게서, 또한 그들 안에서 시간 속에 창조하셨으나 나는 기억치 못하겠나이다. 나의 유아기는 오직 당신이 그들을 통하여 나에게 젖먹이의 양식을 주시고, 행복 또한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나왔을 따름이니이다. 당신께는 덧없는 만물의 모든 원인, 변화하는 삼라만상의 불변적 근원, 또한 이성이 없는 모든 시간적 존재의 영원한 이치가 있사옵나이다. 그러므로 당신 안의 것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나이다.
모든 생명체는 당신에게로 좇아 나왔음을 고백하나이다. 당신만이 우리를 창조하셨나이다. 당신은 최고의 존재시며 최고의 생명 그 자체이심이니이다.
진실로 변함이 없으시고 지극히 높으신 당신은 항상 ‘오늘’이라는 날짜가 지나가지 않나이다. 그러나 또한 ‘오늘’이라는 날짜가 지나가기도 하는 것은 당신 안에 모든 세계가 있기 때문이니이다. 우리의 날들은 당신의 ‘오늘’을 통하여 지나갔으며 당신의 ‘오늘’로부터 척도와 존재를 부여받았나이다.
그러나 내가 망각할 수 없는 일은 시편 51편 5절,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의 말씀처럼 내가 죄 없던 때가 언제였으며 죄 없던 곳이 어디였나이까?
소년기의 나는 내 주위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언어라는 표상을 주고받게 되었사오며, 부모님의 명령과 어른들의 지도에 따라 인생의 거친 파도가 이는 사회 속으로 점점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나이다. 어른들은 올바른 생활이라며 나에게 제시된 것은 잘살기 위해서는 인간의 명예와 헛된 부귀를 얻게 하는 웅변술에 뛰어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내지 못하면 매를 맞아야만했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이일을 당연히 여기었고, 우리는 이 벌을 피하기 위해 상당히 간절히 당신에게 기도를 드려야 했습니다.
여하튼 당신의 뜻은 놀기 좋아하는 우리가 나이에 맞는 재능을 우리가 충분히 가지는 것이었나이다. 그러나 놀이에 대한 재미가 커지고 그 놀이에서 승리를 뽐내며 허구적인 이야기로 내 귀를 간질이기를 좋아해서 어른들의 놀이인 연극이나 경기를 구경하는 재미까지 구하게 되었나이다.
어머니는 세례를 연기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당장 닮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장차 그 형상대로 빚어질 수 있는 ‘진흙 덩어리’로 그냥 있는 것을 허락하고자 했나이다.
나는 애네아스를 사랑하여 죽은 디도를 애도하면서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 불쌍한 자는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웅변의 명성이나 문법이나 철자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에 온 정신을 다 쏟으면서도 원수를 미워하여 한 사람을 ‘인간 사회에서’ 소외시키는 일은 서슴없이 행하였나이다.
그러하오나 주여 당신이 나를 어린 아이로 내버려 두셨다하여도 나는 당신께 감사하나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었나이다. 이 선물로 나는 더 풍성해지고 온전해짐으로 당신이 계신 곳에 나도 함께 있게 되리니, 이는 내가 존재하는 것조차 당신이 내게 주신 것인 까닭이니이다.
제 2 권 사춘기의 분요함
고통스러운 추억을 통하여 나의 지극히 추악했던 과거의 행로를 돌이켜보는 것은 순전한 기쁨, 복되고 확실한 기쁨이 되시는 당신만을 나의 기쁨으로 삼으려 함입니다. 이제 당신을 떠나 여럿의 세계에서 망하게 되었을 때 산산조각이 나 흩어져있던 나를 거두려 하나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당신의 면전에서 내 동류 인생들에게 하는 것이니, 나나 이 글을 읽는 그 누구나 아득히 “깊은 데서”당신께 부르짖어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자는 데 있나이다.
그때 나는 당신을 멀리 떠나 궁핍한 땅을 스스로 찾아갔나이다. 그리하여 내 어머니는 내가 다른 사람의 아내와 간음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나이다. 열여섯 살 때 나의 우정이란 정욕을 불태우는 도구였나이다. 이 친구들은 함께 죄를 짓기에 적합한 자들이었으니 나는 이들과의 그릇된 우정으로 점점 더 더러워지기 시작하였나이다. 그 단적인 예로, 나는 친구들과 함께 우리 집 포도원 근처에 배나무 한 그루에서 배를 도둑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배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도둑질하는 그 자체, 죄를 짓는 것 자체가 좋아서 행한 일인 까닭이니이다. 나는 한 때나마 저속한 것으로 나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욕망에 불타있었습니다.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부패한 존재로 있었으나 알지 못하고 오직 나 자신과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기를 바랐나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죄를 짓는 이유는 무엇이나이까? 그것은 우리가 지극히 하찮은 것이라 일컬은 그 재화 중 어떤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 또는 그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사람들은 보통 생각할 것이니이다. 영예와 권세와 부를 얻게 되며, 법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게 되고, 재산의 부족에서 오는 경제적 어려움과 죄악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원했던 까닭이니이다. 그러므로 시기와 질투와 교만을 무기로 이들은 죄를 만들어가나이다. 그러나 이런 죄를 범함은 오로지 당신을 멀리 떠나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나이까? 그 멀어짐은 진리를 상실하게 하고 이 진리의 상실은 바로 당신의 사랑을 잃어버림과도 같나이다.
당신의 건전한 사랑, 당신의 보드라움, 전지하신 분, 가장 순수하시고, 무흠하신 분이심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가증한 행위를 용서하셨나이다. 그리고 당신으로 인하여 나를 순결하고 무죄하게 돌리셨나이다.
제 3 권 마니교 신자가 되다
나는 카르타고로 갔는데, 내 주변 도처에는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그릇된 사랑의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나이다. 연극은 그런 나를 사로잡았는데, 나의 비참한 모습을 비춰 주는 장면과 나에게 정욕의 불길을 일으켜 주는 화약이 가득한 것이었나이다. 연극 중에도 비극을 좋아하였는데, 이는 슬픔을 느끼게 해주고 마음껏 동정을 베풀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니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올바른 동정심을 가진 자는 오히려 아픔을 일으키는 원인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니이다.
나는 소위 ‘불량학생들’을 친구로 사귀고 있었는데, 그들의 난폭한 행동을 따라하는 것은 삼갔나이다. 주님 나를 포함한 그들이 남을 비웃고 속이는 일을 즐기기에 앞서 악마들이 먼저 저들을 비웃으며 몰래 꾀어 속이고 있었으니, 완전히 엎어지고 망하게 된 것은 사실은 저들 자신이었나이다.
그 당시 나는 수사학의 대가가 되기를 소원하였는데, ⌜호르텐시우스⌟라는 책을 통하여 내 생각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 책에는 과거와 현재의 사람들의 모두를 지적되거나 소개되고 있었으며 또 당신의 영이 당신의 선하고 신실한 종, 바울을 통하여 허락하신 다음과 같은 은혜로운 권면의 말씀을 밝혀주는 것이 들어 있었나이다.
그러나 성경은 교만한 자들에게 닫혀 있듯이 나는 성경을 읽고 실망을 느끼게 되었으니 교만함으로 가득 찬 나의 통찰력으로는 성경의 내적 의미까지 통달할 수 없었음이니이다. 그리고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지게 되었나이다. 이들은 진리에서 멀리 떨어진 자들로써, 입에서 굴러 나오는 시끄러운 소리를 낼 뿐인 군소리의 소유자들이었나이다. 내가 굶주려하는 것은 창조된 저 영적인 것들이 아니라 오직 진리 되시는 당신 자신이었으니, 당신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나는 그 때 전혀 존재하지도 않은 헛된 환영들이 그때의 내 양식이었으니, 꿈속에서 보는 음식처럼 사람에게 전혀 영양이 되지 않는 것이었나이다.
마니교는 선한원소 다섯 가지, 빛, 공기, 바람, 불, 물과 악한 원소 다섯 가지, 어둠, 연기, 나쁜 바람, 나쁜 불, 나쁜 물의 대비로 세상을 나누고 서로 다른 색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육의 시력으로 당신을 찾으려하였으나 당신은 내 안의 가장 깊은 곳보다 더 깊이 계셨고, 나의 가장 높은 곳보다 더 높이 계셨나이다.
마니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공간 안에 잡아두려고 하였고, 인간의 죄를 미끼로 하나님의 의를 시험하였나이다.
이는 하나님은 영이시며, 하나님에게는 길이나 폭을 가진 지체가 없으시며, 또한 일정한 부피를 가진 덩어리가 아니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음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또 참된 내적인 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였는데, 이의는 관습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지극히 올바른 법에 의해서 판단되는 것이오니, 이 법은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오니, 시간과 장소가 바뀐다 해도 바뀌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이 이 법에 의해서만이 의인이 될 수 있음을 몰랐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항상 똑같은 의만을 추구하시나이다. 이의는 가변적이지 않으며 시대를 초월하나이다. 그러므로 시대에 따라 하나님이 명하시는 의의 법은 단지 그 시대에 합당한 것을 명령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의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죄악의 동기는 복수심, 욕심, 시기심, 남의 고통을 즐기는 마음이 있는데, 이런 악들이 당신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나이다. 그러나 당신은 이러한 죄악을 징치하시니, 죄악을 행하는 자가 스스로를 해하도록 저를 벌하시나이다.
하나님의 판단이 인간의 판단보다 중요하니, 어떤 부분이든지 전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추하게 보이므로 자기의 정욕 때문에 관습을 깨거나 사회규범을 해치는 것이 제재를 받아야하오나, 당신의 명령은 한번도 시행되지 않았을지라도 시행해야하며, 폐지되었던 명령이라도 다시 제정해야할 것이니이다.
음식에 있어서도 마니교도들은 음식을 먹는 자가 성인이면 그 음식 또한 거룩하여 져서 성인이 말을 하거나 숨을 쉴 때에 하나님의 조각들을 내어놓는 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이다.
하오나 당신은 어머니의 눈물을 멸시치 않으셨으니, 꿈으로 희망을 심어주셨나이다. 어머니는 꿈속에서 나무로 된 자위에 서 있는 자신을 보았는데, 빛나는 옷을 입은 청년 한 사람이 어머니를 보고 왜 슬퍼하는지를 물었고 어머니는 자식의 타락으로 인한 괴로움을 말하셨는데, 그 청년은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어머니가 있는 곳에 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머니와 내가 나란히 그 자위에 서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나이다. 그 후로 어머니는 내가 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 안에 내가 언젠가는 꼭 함께 할 것이라는 확신에 찬 믿음을 잃지 않으셨나이다. 또한 어머니는 어느 감독에게 나에게 권면할 것을 부탁하였는데, 거절을 당하셨나이다. 그 이유인 즉 이단의 가르침에 빠진 자에게 권면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그만 가시오! 그대의 삶을 두고 이르노니, 눈물의 아들은 결코 망하지 않소.’
제 4 권 마니교의 늪에서
내 나이 열아홉부터 스물여덟까지 9년 동안 우리는 여러 가지 욕심에 휩싸여 스스로 시험을 받고 또 남을 시험하는 일을 하는 자들이었으며, 스스로 속임을 받고 또 남을 속이는 일을 하는 자들이었사오니, 표면적으로는 소위 ‘자유자들을 위한 학문’이라는 것을 통하여, 그리고 이면적으로는 ‘종교’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가지고 그러한 일을 했었나이다. 그 무렵 나는 수사학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말로 남을 이기는 재주를 파는 것이었나이다. 또한 어떤 여자와 동거를 시작하였는데, 정욕으로 찾아낸 여자였나이다. 나는 그 여자에게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애정을 쏟아부었나이다.
또한 점성가들을 찾아가는데도 나는 주저하지 않았나이다. 나의 친구인 네브리디우스의 권면도 소용이 없었으니 점성술 책을 쓴 사람들의 권위가 나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니이다. 그러나 이들의 대답이 올바른 대답을 하는 것이 우연이나 예언의 힘에 의한 것이지, 별 하늘을 관찰하는 그들의 기예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증명해주는 확실한 책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때까지는 아직 찾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나이다.
참된 우정이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 바”(롬 5:5)된 사랑으로 인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당신이 서로 맺어 주실 때만 성립될 수 있음이니이다.
나는 고향에서 나와 학문적인 관심이 같은 친구를 얻었는데,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친구였나이다. 나는 그 친구를 마니교의 신화 속으로 빠져들게 하였나이다. 그러나 일년도 되지 않는 우정을 뒤로 하고 당신의 부름에 하늘나라로 갔나이다. 다행인 것은 그가 세례를 받아들이고 떠났다는 것이나이다. 나는 그 친구로 인하여 자유하니 당신이 거두셨기 때문이니이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오직 눈물만이 달콤하게 느껴졌으니, 그 친구 대신 눈물이 내 영혼의 유일한 낙이 되었나이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 흘린 눈물은 달콤하며 이 달콤함은 당신이 혹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실지 모른다는 희망 때문임은 아닌지요? 그러나 그 때의 나의 눈물은 쓰디쓰고 슬픈 눈물이었으니 기쁨을 잃어버린 까닭이니이다.
우리 영혼은 이렇듯 사라져 없어질 것을 사랑하다 그것을 잃으면 깊은 상처를 받아 불행을 느끼나, 실상은 사라져 없어질 것을 사랑하는 영혼은 이미 그것을 잃기 전부터 불행한 상태에 있었나이다. 나는 그런 상태에 있었나이다.
나는 그를 위해 나의 생명을 바꾸고 싶었으나, 저를 위해 나의 생명을 완전히 잃고 싶지는 않았음이니이다. 내 마음속에 죽도록 살기 싫고, 그러면서도 정작 죽기는 정말 싫은, 이렇게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감정이 왜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나이다. 생각건대 내가 그 친구를 사랑하면 할수록 내게서 그를 앗아간 죽음을 가장 흉측한 원수처럼 미워하게 되었나이다. 분명한 것은 그 친구의 ‘제2의 영혼’이었던 내가 그 친구가 죽었음에도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었나이다. 아마도 나마저 죽으면 내가 그처럼 뜨겁게 사랑했던 그 친구가 온전히 죽지나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니이다.
나는 다시 카르타고로 갔나이다. 그러나 나 자신이 나에게 불행의 터전이 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나이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을 피하여 달아날 곳이 실로 어디겠나이까? 내가 나 자신을 피해 어디로 달아나리이까? 내가 어디로 간들 내가 나를 따라가지 않겠나이까? 그런 와중에도 나는 시간의 오고 감을 통하여 나의 마음속에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추억을 심어주었사오니, 점차 옛날에 즐기던 일을 다시 즐기게 되었고, 그로 인해 나의 슬픔이 조금씩 가라앉게 되어 평온을 되찾게 되었나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자, 친구를 당신 안에서 사랑하는 자, 원수를 당신 때문에 사랑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이는 오직 이러한 사람만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잃지 않게 되는 까닭이니, 저는 누구를 사랑하든지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는 그분 안에서 사랑함이니이다. 잃어버리는 것은 당신을 떠나는 자 외에는 당신을 잃는 자가 아무도 없으나, 당신을 떠난다 해도 다시 진노하시는 당신께로 갈 뿐이 아니니이까?
사라져 없어질 것은 참된 안식을 주지 못함이니, 모든 것이 다 노쇠해지지는 않으나 사멸하기는 다 마찬가지라. 그러므로 저들은 생성함으로 존재를 추구하나, 저들이 존재를 위하여 빨리 성장하면 할수록 저들은 그만큼 더 빨리 비존재를 향하여 가게 되나이다. 이는 어떤 단어가 일단 발음된 다음에 없어지지 아니하면 다른 단어가 이어지지 않아 온전한 문장으로 된 말이 될 수가 없음이니이다. 만물들은 우리가 영혼 속에 그릇된 욕심을 일으켜, 그것을 망하게 하오니, 이는 영혼이란 그것이 사랑하는 것 속에 있고 싶어 하고 그 안에서 쉬기를 원하는 까닭이니이다. 그러나 예정된 출발점에서 예정된 종착점까지 달려가는 만물들을 붙들기에는 그 힘이 충분치 않나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에 참된 안식은 없나이다.
그러므로 내 영혼아, 하나님의 진리인 그곳에 모든 것을 맡기라! 네게 있는 모든 것은 진리에서 온 것이니, 진리에 모든 것을 맡기라! 그것들이 너와 더불어 영원토록 굳게 설 것이니, 곧 영원토록 굳게 서 계시는 하나님 곁에서 그러할 것이라. 내 영혼아, 어찌하여 너는 그릇되게 네 육신을 좇느냐? 돌이키라! 네가 육신을 통하여 감지하는 것은 부분적인 것이라. 너는 부분적인 것의 근원이 되는 온전한 것을 몰라서 부분적인 것을 즐거워하는 도다. 그러나 부분이 모여서 전체를 이루는 도다. 하지만, 어떤 것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적인 요소들이 동시에 존재하지는 않도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것을 감지할 수만 있다면 부분적인 것보다는 전체적인 것이 더 많은 즐거움을 주도다.
아름다운 육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서 그것을 사랑하라! 이는 그것이 가변적이어서 하나님의 붙드심을 받을 때만 요동치 않으며, 만일 그렇지 못할 때는 덧없이 멸망함이라. 하나님은 지으시고 멀리 떠나시는 분이 아니니,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으며, 또한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느니라. 그러나 우리의 심령은 복된 삶을 죽음의 곳에서 찾고 있으나, 거기에는 그런 것이 없도다. 삶조차 없는 곳에 복된 삶이 어찌 있을까 보냐? 그리하여 우리의 참된 생명 되시는 그분이 몸소 이 세상에 내려 오사 우리의 죽음을 당담하시고 자신의 풍성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없이 하셨도다. 이는 그가 쉼 없이 달리시며, 우리를 향해 자기에게로 돌아오라 외치시되 말씀과 행동, 죽음과 삶, 지옥하강과 승천을 통하여 외치심이라. 그러므로 그는 떠나셨으나 실상은 우리에게서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음이니이다.
당시 나는 낮은 단계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나이다. 내가 자세히 사물을 살펴보니, 어떤 것은 그 사물 자체가 아름답고, 어떤 것은 조화를 잘 이루어서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있나이다. 나는 이 아름다움을 위하여 책을 썼는데, ⌜아름다움과 조화에 관하여⌟라는 책을 두권 썼나이다. 그 때 내 나이는 스물예닐곱 되던 해였을 것이다.
나는 그 책을 로마의 수사학자 히에리우스에게 바쳤나이다. 이는 저가 시리아 사람으로서, 처음에는 헬라 수사학에 능통하더니, 라틴 수사학에 대해서도 놀라우리만큼 탁월하였고 철학에 관한 지식도 매우 해박하였음이니이다. 나는 그에게 인정을 받기를 갈망하였나이다. 나는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나이다. 그 때는 잘 몰랐지만, 내가 저를 사랑하고 본받으려는 욕망은 저를 칭송하는 사람들의 저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나이다. 그의 인간됨 자체는 달라진 것이 전혀 없으며, 오직 그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들의 생각만이 달라진 것이니이다. 그러므로 칭찬은 사람의 마음에 거짓이 없다고 여겨질 때, 곧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칭찬할 때만 칭찬받는 사람이 사랑받는 사람도 되는 것이니이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을 사랑할 때, 사람들의 판단을 따라 해서는 안 되고 오직 당신 안에서만 우리는 속임을 당하지 않나이다.
내 영혼은 그 책을 쓸 때에 사물의 형상만을 좇아갔으니, 덕에는 일치가, 악덕에는 일종의 분리가 있다고 보았나이다. 그리하여 일치는 이성적 영혼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 속에 진리나 최고선의 본질이 있고, 분리는 비이성적 삶에 속하는 것으로서 잘은 모르지만 그 속에 최고악의 실체 내지 본질이 있다고 생각했나이다. 그때 나는 비록 최고악이 당신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가련하게도 최고악이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 생명까지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나이다. 그리하여 나는 일치를 마치 성별이 없는 이성처럼 ‘단일자’라 부르고, 분리는 폭행할 때의 분노나 음행할 때의 정욕처럼 ‘중첩자’라 불렀으니, 이는 악은 어떠한 실체도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이성 역시 변함없는 최고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알지도 배우지도 못했음이니이다.
무릇 행동의 바탕이 되는 영혼의 움직임이 왜곡되어 오만하고 거칠어질 때 포악한 행동을 하게 되고, 영혼의 정념이 절제를 잃고 육신의 쾌락을 추구할 때 음행을 하는 것같이, 이성적 영혼이 혼탁해질 때 그릇되고 거짓된 생각들이 우리의 삶을 더럽히게 되나이다. 그러므로 어떤 다른 빛으로부터 조명을 받아야 했으나,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맛본 것은 죽음뿐이니이다. 나는 내가 본질적으로 당신과 같은 존재라는, 주장으로 당신도 나처럼 가변적인 존재임이 분명하다고 생각을 하였나이다. 나는 감각적인 형상만을 상상했고, 내 안에도, 물체 안에도 존재하지 않는 허망한 것 사이를 헤매고 다녔나이다. 그 허망한 것이란 당신의 진리가 나를 위해 창조한 것이 아니라 감각적 세계가 제공하는 허상을 따라 나의 망상이 지어낸 것이었나이다.
내 나이 스물 살쯤 되던 해 나의 수중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십범주론⌟이라는 책이 들어왔는데, 내가 보기에 그 책은 실체와 그 속성에 관하여 논하는 것이 분명하였나이다. 예컨대 사람이라는 실체에 있어 그의 성질은 어떠한지, 그의 키는 몇 자인지, 혈족 관계로는 누구의 형제인지, 그가 어떤 장소에 있는지,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 그가 서 있는지, 앉아 있는지, 신을 신고 있는지, 무장을 하고 있는지, 또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를 말할 수 있는데, 모든 것은 내 방금 예시한 대로 아홉 가지 범주에 속하든지, 아니면 실체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니이다.
이는 모든 존재를 이 열 개의 범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 인해, 신묘하게 순수하시며 불변하시는 당신까지도 그러한 방식으로 파악해 보려 했음이니이다. 그리하여 당신을 크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실체로 생각하였나이다. 마치 어떤 물체가 무슨 속성을 지니는 것처럼 당신도 크기라는 속성, 아름다움이라는 속성을 지니는 어떤 주체라고 생각하였나이다. 하오나 당신이야말로 당신의 크기 자체시며, 당신의 아름다움 자체가 아니시니이까?
나는 또 소위 ‘자유학예’에 관한 책들을 내가 구해서 읽을 수 있는 대로 모두 읽고 나 혼자의 힘으로 이해할 수 있었으나, 내게 무슨 도움이었겠나이까? 나는 그 책들을 읽고 기뻐했으나, 그 속에 있는 모든 참된 것, 모든 확실한 것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나이다. 이는, 내가 빛에 등을 돌리고, 빛의 조명을 받는 것들에 얼굴을 향하였음이니이다. 나는 내 얼굴을 향하여 빛의 조명을 받는 것들은 바라볼 수 있었으나, 정작 나 자신의 얼굴은 빛의 보명을 받지 못하였나이다.
나의 빠른 이해력이나 날카로운 통찰력은 당신의 선물이니이다. 하오나 나는 그것으로 인해 당신께 감사와 찬송의 제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나이다. 오히려 당신을 공공연히 모독하면서 당신을 향해 개처럼 짖어 대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사오니, 그러므로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해가 되었나이다.
당신만이 우리의 참 능력이 되시는 까닭에, 만약 우리가 홀로 있다면 우리의 능력은 오히려 무능력이 됨이니이다.
제 5 권 마니교와의 결별
나의 혀라는 손을 사용하여 당신께 드리는 나의 이 찬양과 고백의 제사를 받아 주소서! 당신의 모든 피조물이 쉼 없이 소리 높여 당신께 찬양을 드리니이다. 그러나 당신을 보지 않으려고 도망하지 않는 자들은 눈이 어두워 당신께 부딪혔사오니 이는 당신이 만드신 것을 당신이 하나도 버리지 않으심이니이다. 불의한 저들은 당신께 부딪혀 저들에게 합당한 벌을 받고 말았사오니, 저들은 당신의 온유하심을 피해 달아나다가 당신의 공의로우심에 부딪혔고, 당신의 지엄한 진노 아래 떨어지게 되었나이다.
당신이 나를 찾으실 때 나는 당신 앞에 있었사오나 내가 나 자신에게 멀리 떠나있었던 까닭에 당신을 발견하지 못했나이다. 그러나 주여, 당신은 모든 것들의 창조자시니, 당신은 이제 저들을 재창조하시고 또 위로하시나이다.
내 나이 스물아홉 살 시절을 나의 하나님께 아뢰려 하나이다. 파우스투스는 마니교의 어떤 감독으로 ‘마귀의 올무’였으나 나는 그를 만나기를 갈망하였나이다. 그는 순수학문에 조예가 매우 깊고, 특히 자유학예에 뛰어나다는 것이었나이다. 나는 그 당시 언변과 진리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이다. 그래서 명성이 높은 파우스투스의 지식에 더 주목하였나이다.
철학자들은 저들이 가진 이성과 당신이 저들에게 주신 재능을 사용하여 많은 것을 발견해 냈으니, 예컨대 일식과 월식이 일어날 날짜와 시간과 범위를 여러 해 전에 미리 말하매, 저들이 말한 것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저들이 말한 그대로 이루어졌나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어둠은 보지 못하나니 이는 저들이 이러한 것을 연구하는 저들의 재능이 어디서 오는지를 경건한 마음으로 궁구하지 않는 까닭이니이다. 마니는 이런 것들에 관하여 많은 글을 썼으나, 그 내용은 너무나 허황된 것으로 가득 차 있었나이다. 즉 하지와 동지, 춘분과 추분, 일식과 월식 등에 관하여 그가 쓴 내용은 세속 철학자들의 책에서 내가 배운 내용과는 달리 타당성이 전혀 없었나이다. 마니는 그저 믿기만 하라고 했으나, 그가 믿으라는 내용은 내가 수학적으로 계산해보고 내 눈으로 관찰해 본 것과는 전혀 맞지 않고 동떨어진 내용이었나이다.
사람의 진정한 행복은 당신을 앎으로 얻어지나이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지식이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이 내대신 알아서 다해주시니 당신을 아는 것은, 나보다 뛰어난 자보다 더 행복하게 하나이다.
하온데 마니는 스스로를 학자라, 스승이라, 지도자라, 두령이라 하면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당신의 성령이라 믿고 따르기를 요구하나, 저의 말이 거짓임이 밝혀질 때 누가 이런 광증을 혐오해야 할 것으로, 또 멀리 떨쳐 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겠나이까?
파우스투스는 문법을 제외하면 자유학예에 대해서는 별다른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나이다. 문법교육도 평범한 수준에 불과하나이다. 그러나 나는 자기 자신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 자세가 내가 원하던 지식을 획득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졌음이니이다. 그러나 그와 대화를 자주 가지므로 인해 나는 그의 올무에서 점점 벗어나게 되었나이다.
나는 어머니를 속이고 로마로 가서 카르타고에서 가르치던 것을 가르치기로 결심한 것은 당신의 뜻이니이다. 그때 나는 카르타고에서는 현실의 불행을 혐오했으나, 로마에서는 거짓된 행복을 추구하였나이다. 어머니의 고통은 더해졌으나 하나님은 나를 그대로 내버려두셨나이다. 그래서 첫째, 나의 정욕으로 나를 붙들어 가게 하사 정욕 자체를 없애시고, 둘째, 어머니의 육신적 욕심에는 슬픔이라는 온당한 채찍으로 징벌을 가하고자 하셨음이니이다.
나는 로마에서 병이 들어 원죄라는 사슬 뿐 아니라, 그 밖의 수많은 무거운 죄악을 짊어지고 ‘음부로’(욥7:9) 내려가고 있었나이다. 그러나 나를 불쌍히 여기사 내 육신의 건강을 회복시키셧는데, 당신을 거역하는 내 심령은 여전히 병들어 있었나이다. 아! 당신은 당신이 행하려고 예정하신 일을 순서에 따라 행하고 계셨나이다. 나는 아직도 내가 죄인이 아니라는 생각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나의 죄악은 더욱 고치기 어려운 것이 되어 갔나이다.
마니교는 하나님을 지체가 있는 형상으로 보았으나 나는 인정하지 않았나이다. 그러나 큰 물체 덩어리로밖에는 생각할 줄 몰랐으니, 악도 그와 같은 실체로서 추하고 보기 흉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였나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악을 서로 적대적인 두 개의 물체 덩어리를 상정하였나이다. 이것은 성육신하신 당신을 믿는 것보다 더 경건하다고 생각을 하였나이다.
나는 신약성경은 유대교의 율법을 기독교 신앙에 접목시키고자 누군가가 위조한 것이라 하였나이다.
거칠고 난폭하고 무례한 카르타고 학생들을 피하여 로마로 갔으나 그들은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었나이다.
그때에 나는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를 만나게 되었나이다. 그는 말하는 솜씨는 파우스투스보다 재미가 덜하지만, 학식이 더 풍부하게 배어 나와 듣기에 유쾌하였나이다. 더구나 그 내용을 보면 비교도 되지 않았나이다. 파우스투스는 마니교의 거짓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헤매는 자였다고 한다면, 암브로시우스는 구원의 도리를 지극히 건전하게 가르치는 자였기 때문이었나이다. 그러므로 그가 어떻게 말을 잘하는지 듣기 위하여 내가 마음을 열었을 때, 그가 말하는 참된 내용도 동시에 들어왔나이다. 물론 그 일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니이다. 그러는 중에 나는 최소한 마니교도들과 결별해야겠다는 결심만 굳히게 되었고, 철학자들에게 내 영혼의 병을 치료해 달라고 맡기는 일을 그만두었으며, 부모님의 당부대로 보편교회의 학습교인의 지위를 유지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아직 나는 영적인 실체에 대해 이해력이 부족하여 거짓된 이론을 내 마음에서 완벽하게 몰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니이다.
제 6 권 정신적 방황의 계속
어머니는 나를 만나러 밀라노로 오셨나이다. 그때 나는 실로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에 심한 위기에 처해있었나이다. 그러나 오류에서는 이미 벗어났을 때이니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도의 응답을 평온함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더욱 간구하여 진리에 이르기를 갈망하였나이다. 또한 나를 변화시키는 암브로시우스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씀을 사모하여 열심히 교회를 찾아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마셨나이다. 또한 성인의 기념관에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는 습관을 암브로시우스에 의해 기쁨으로 버렸나이다. 그 포도주는 사람을 취하게 하였기 때문에 암브로시우스는 금지령을 내리게 되었나이다.
나는 당신의 말씀이라는 양식이 마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입에 되새김질할 때 어떠한 기쁜을 맛보는 것인지 몰랐으므로, 당신께 간절히 기도하기보다는 학문에만 몰두하고 논쟁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나이다. 암브로시우스는 바쁜 사람이라 그와 단독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였나이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점점 하나님의 말씀을 거슬러 악의에 찬 모함으로 엮어 놓은 모든 매듭을 풀 수 있다는 확신이 점차 더 커졌나이다. 나는 내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반대해 왔던 것은 보편교회의 정통신앙이 아니라, 육신적인 생각이 만들어 낸 허상인 것을 그제야 깨닫고 부끄러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나이다.
그러나 신자가 되는 것은 두려운 모험과도 같은 것이었나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여지껏 내가 맹렬히 비난하던 것을 교회가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으며, 구약성경의 율법과 선지자들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며 읽게 되었다는 것이니이다. 나의 판단은 중지를 당하고 말았나이다. 그것으로 인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나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내가 알고 있는 많은 것들 현장속에 내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믿지를 않는다면 어느 것 하나 완전하게 없었나이다. 내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조차도 내가 믿지 않는다면 알 수 없었던 일이 충분히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나이다. 그러므로 비록 당신이 대체 어떠한 분인지 모를지언정, 당신이 계시다는 사실과 인간 만사를 다스리심이 당신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게 만든 일은 없었나이다. 단지 당신의 본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당신께로 가는 길은 어떠한 길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나이다.
아! 당신은 진리시며 당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은 성경을 통해서 당신을 믿는 이것이니, 그때에는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 아닌 것, 명예와 부와 결혼의 추구로 얻어지는 즐거움을 당신은 허락하지 않으심으로 나에게 은혜를 더하셨사오니, 당신은 나를 끈적끈적한 죽음의 끈끈이에서 떼어 주셨음이니이다. 나는 골목길에서 본 돈 몇 푼에 기쁨의 웃음을 짓는 거지를 부러워했는데, 그 거지가 가졌던 기쁨이 참된 기쁨이라서기보다는 내가 추구했던 야망이 훨씬 더 허망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나이다. 내가 느끼는 기쁨은 학문 자체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들 기쁘게 해 주는 것을 추구하는 기쁨이었기 때문이었나이다. 그 거지와 마찬가지로 내가 추구하던 영광도 참된 영광은 아니었음이니이다. 믿음의 소망에서 오는 기쁨과 헛된 것에서 오는 기쁨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차이가 있나이다.
나는 그때에 귀중한 친구 둘을 얻게 되었는데, 알뤼피우스와 네브리디우스였나이다. 그 중 알뤼피우스는 나와 같은 도시출신으로 타가스테에서 내게서 배웠고 내가 착하고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해 나를 무척 사랑하였나이다. 그는 원형극장을 광적으로 좋아했는데, 내 강의를 듣고 굳센 절제력을 발휘하여 영혼을 가다듬었으니, 원형극장의 더러운 것은 저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그 후 그는 결코 그곳을 가지 않았나이다.
마니교 신자들이 자랑하는바 절제라는 것을 참되고 순수한 것이라 믿고 사랑했던 까닭이니이다. 하오나 그것은 사람을 기만하는 광적인 절제로서, 아직 참다운 덕의 깊이를 알지 못하여 겉모양에 속기 쉬운, 그러나 귀한 영혼들을 가장된 덕의 허울로 사로잡는 것이었나이다. 그러나 알뤼피우스는 또 다시 검투 경기에 탐닉하게 되었나이다. 저의 영혼이 이렇게 연약했던 것은, 저가 당신을 의지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의지했던 탓이니이다. 저는 피를 보자마자, 그 피를 야만인처럼 들이마시게 되었사오니, 그 사악한 투기를 즐기며 잔혹한 쾌락에 흠뻑 취하고 말았나이다. 하오나 당신은 지극히 강하고 자비로운 손으로 저를 거기에서 건져 주사, 저로 하여금 자신을 믿지 않고 오직 당신만을 믿도록 가르쳐 주셨는데, 이는 한참 후의 일이니이다. 알뤼피우스는 한 때 도둑으로 몰린 적이 있었는데, 저가 송사를 취급할 때, 남의 말을 경솔히 믿고 사람을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우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이 알뤼피우스를 나는 로마에서 다시 만났고, 그는 나와 깊은 우정으로 맺어져 나와 함께 나와 함께 밀라노로 가게 되었으니, 그 첫째 이유는 나와 떨어져 있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그의 부모의 뜻을 따르기 위함이니, 그는 이미 세 번이나 배석판사로 있으면서 청렴결백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나이다.
네브리디우스도 나와 함께 지내면서 불타는 열심히 진리와 지혜를 탐구하자는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은 없었나이다. 복된 삶을 열심히 추구하고 지극히 어려운 문제를 예리하게 궁구하는 자였던 저는 우리와 함께 탄식과 방황을 같이 나누었나이다.
나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방황을 계속하였으니, 그 당시 벌써 나이 삼십이었으나, 아직도 예의 그 진흙탕에 빠져 나를 흐트러뜨리며 도망치는 현세적 재화를 즐기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이렇게 독백하고 있나이다. ‘···보라 파우스투스가 와서 모든 것을 밝혀 주리라.···성경책에서 불합리하게 보였던 부분들이 이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구나···인생은 비참하고 죽을 때를 모르나니, 죽음이 갑자기 찾아오면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 이승을 떠나게 될까?’ 나는 이런 마음의 요동함 속에서 하나님 안에서 사는 일을 미루고 있었나이다.
나는 안정을 찾기 위해 결혼을 생각했으나, 알뤼피우스는 적극 만류를 했다. 그 이유는 지혜의 탐구를 계속할 수 없음을 말했다. 그러나 그도 점차 나에게 동화되어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나이다. 하온데 우리는 둘 다 집안을 다스리고 자녀를 기른다는 결혼한 사람들의 신성한 의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나이다. 도리어 나는 채워지지 않는 정욕을 채우려는 습관에 사로잡혀,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는 호기심으로 인하여 종살이로 끌려가고 있었나이다.
어머니는 내가 날마다 조금씩 세례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 가고 믿음의 진보를 보이게 되자, 자기의 소원과 당신의 약속이 성취되어간다는 생각에 기뻐했나이다.
그러는 중에도 우리는 공동생활을 꿈꾸었는데, 괴롭고 소란한 인간 생활이 몹시 싫어져서 y속세를 떠나 조용한 생활을 해 보자는 생각에서였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계획으로 끝나고 말았고, 나는 동거녀와 헤어지기로 결심을 하였나이다. 그녀는 아들을 두고 아프리카로 돌아갔나이다.
나의 구원이 가까울수록 고통은 심해졌나이다. 특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 장차 있을 당신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뿐이었나이다. 이러한 생각이 크나큰 불행의 원인인 줄 모르고 나는 수렁 속에 깊이 빠져 장님이 된 채, 덕과 아름다움이라는 빛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 빛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는바,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심령 깊은 곳에 있는 영혼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니이다.
제 7 권 플라톤주의의 영향
악하고 죄 많던 내 청년기는 이미 지나가고 장년기에 접어들었는데, 당신을 지극히 높으시고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으로 생각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당신은 썩지 않으시고 손상 받지 않으시며 변함이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에서부터 믿었나이다. 왜, 어찌해서 그렇게 믿고 생각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으나, 한 가지 밝히 보고 확신했던 것은 썩는 것이 썩지 않는 것보다 못하고, 손상 받지 않는 것이 손상 받는 것보다 물론 더 낫고, 변하지 않는 것이 변하는 것보다 더 좋다는 사실이었나이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일정한 공간 안에 연장돼있거나, 전개돼있거나, 집중돼있거나, 팽창돼있거나 하지 않는 것은, 또 어떤 물체를 수납하지 않거나 수납할 수도 없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였나이다. 그러나 만약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땅의 부분 가운데서 크기가 더 큰 것은 당신을 더 많이 차지하고, 작은 것은 당신을 덜 차지하게 되며, 모든 것이 당신으로 가득 차 있되 코끼리는 참새보다 당신을 더 많이 차지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됨이니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몸집이 큰 것일수록 당신을 더 많이 차지하게 되어, 당신은 세상을 이루는 여러 부분에 대해 큰 것에는 크게, 작은 것에는 작게 나누어져서 임재하게 되나이다. 물론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나이다. 하오나 당신은 아직 ‘내 흑암을’ 밝히시지 않았나이다.
마니교도들은 싸움이 생기는 것은 당신의 한 부분, 당신의 지체 하나, 또는 당신의 본체에서 태어난 어떤 소생이 거스리는 세력 내지는 당신에 의해 창조되지 않은 본성과 혼합됨으로 인하여 심히 부패하고 변화하여 악한 것이 되며, 결국 행복한 상태에서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는바, 구원과 정화를 위하여는 도움이 필요한 연고라는 것이니이다. 또한 그들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영혼인바, 이 억압받고 더럽혀지고 타락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당신의 자유롭고 순결하며 온전한 로고스가 오셨으나, 로고스도 영혼과 동일한 본체에서 나왔기 때문에 썩어질 수 있다는 것이니이다. 그러나 당신에게 어두움의 세력이 무슨 해를 끼칠 수 있다면, 당신은 상함과 썩음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니, 이는 정녕 처음부터 거짓되고, 첫 마디부터 가증스러운 것이니이다.
또한 저들이 악의 원인을 탐구하나, 저들 자신이 악을 행한다고 생가하기보다는, 당신의 본체가 악의 침애를 받는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했나이다. 하온데 나를 당신의 빛으로 끌어올려 주는 것이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의지를 가졌다는 것이 내가 살아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는 확실하다는 사실이었나이다. 그리하여 내가 무엇을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그 의지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나 확실히 알게 되었으며, 바로 여기에 내 죄악의 원인이 있음도 점차 깨닫게 되었나이다.
하나님은 불변적이시므로, 하나님의 의지와 권능은 실로 하나님 자신이니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아시는 당신에게 무슨 우연이 있으리이까?
나는 또 악은 어디서 오는지 그 근원을 찾고 있었으나, 내가 그것을 찾는 방법이 악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나의 탐구 그 자체에 있는 악을 보지 못하였음이니이다. 나는 당신의 피조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보았으며, 그것이 아무리 크다 해도 모든 면에서 유한한 것이라고 생각했나이다. 진실로 악은 어디에 존재하며, 어디서 어떻게 여기까지 침투해 왔는가? 그것의 뿌리는 무엇이며, 그것의 싹은 어디서 났는가? 혹은 악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악을 두려워하며 무서워하는가? 혹은, 우리가 만약 공연히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두려움 그 자체가 분명 악이라. 까닭 없이 마음에 불안과 고통을 안겨 주니 말이다. 만약 악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은 왜 하필 그런 질료로 무엇을 만드시려 했을까? 그의 전능하심으로 오히려 그런 악한 질료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는 없었을까? 아니면 혹시 그 악한 질료가 그분의 뜻을 거슬러서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점성술의 거짓된 점술과 불경한 망령과도 이미 관계를 끊었나이다.
그러나 나의 영혼은 ‘악은 어디서 오는가?’로 계속해서 불안에 떨고 있었나이다. 그러나 당신의 실체는 불변적이라는 것을 믿었으며, 인간에 대한 당신의 돌보심과 심판을 믿었고, 당신은 인간을 위하여 장차 사후에 생명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길을 당신의 아들이시며 우리 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하셨음을 당신이 보편교회에 맡기신 성경의 권위에 의지하여 믿었나이다. 당신을 향해 가는 믿음의 도약의 혼돈으로 나는 얼마나 심한 해산의 고통을 겪었는지요? 내 영혼의 소리 없는 고통은 당신의 긍휼을 간구하는 크나큰 부르짖음이었나이다.
플라톤의 책들은, 당신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는 사실과 사람들에게 겸손의 길을 보여 주시기 위해 긍휼을 베푸사, 당신의 로고스로 하여금 “육신의 되어”(요 1:14) 사람들 가운데 거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나이다. 거기에는 아들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빌 2:6) 아니했다는 내용은 들어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승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었나이다. 또한 하나님이신 로고스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 1:13)이심은 말하고 있으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요 1:14) 거하신다는 것은 읽지 못하였나이다. 그 책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롬 1:22) 어두워져,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롬 1:22) 되었나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 책들을 통해 나 자신으로 돌아가라는 권면을 받았나이다. 그러므로 나는 영원한 진리의 빛에 가까이 나아가나이다. 나는 불변의 빛을 보았는데, 이 빛이 나보다 높은 것은 이 빛이 나를 창조했기 때문이요, 내가 이 빛보다 낮은 것은 내가 이 빛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니이다. 무릇 진리를 아는 자는 이 빛을 알며 무릇 이 빛을 아는 자는 영원을 아나이다. 무릇 참된 사랑은 이 빛을 아나이다. 나는 진리가 유한한 공간이든 무한한 공간이든 공간에는 퍼져있지 않으니,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 무인가? 그러나 당신은 나에게 외치시나이다. ‘아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한 당신에게로 온 피조물의 본성은 온전한 존재도 온전한 비존재도 아님을 깨닫나이다. 그것들이 존재하는 것은 당신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며,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당신과 같은 수준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니이다.
그러나 나는 썩음을 입는 것들도 선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나이다. 그러나 썩음으로 선이 상실되는 것은 분명 해가 되는 것인데, 최고선은 전혀 썩을 수 없고, 전혀 선하지 않은 것에는 그 안에 더 이상 썩을 수 있는 것이 없음이니이다. 그런즉 존재하는 것은 선한 것이니이다. 그리하여 존재하는 것은 다 선하니, 내가 그 근원을 캐묻던 악은 실체가 아니니이다. 그리하여 나는 당신이 만드신 만물은 다 선하며, 당신이 창조하지 않은 실체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고 깨달았나이다.
하온데 부분의 관점에서 보면, 피조물 중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악으로 취급되나이다. 하오나 그것이 또 다른 것에는 조화를 이루어 선한 것이 되니, 그 자체로서는 선한 것이니이다.
나는 두 가지 본체를 주장하는 이론에 빠져 안식을 찾지 못하고 어리석은 말만 하였나이다. 그리고 이원론을 버린 후에는 무한한 공간 속에 두루 퍼져 있는 하나님을 상정하여 믿었나이다. 그러나 당신은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시 119:37) 못하게 하셨나이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이런 상태에서 조금 벗어났고, 나의 광기도 가라앉게 되었나이다.
그리고 눈을 돌이켜 다른 것들을 살펴보니, 그것들이 당신으로 말미암아 존재함과 당신이 그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심을 깨달을 수 있었나이다.
나는 죄가 무엇인가 궁구해본 결과, 그것은 무슨 실체가 아니라 의지의 왜곡임을 깨달았나이다. 곧 최고의 실체이신 하나님 당신에게서 돌이켜 자기 내면 아주 깊숙한 곳에 감추어진 보배를 버리고 밖으로 부풀어 올라, 지극히 비천한 데로 떨어지는 것임을 깨달았나이다.
나는 어느덧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는데, 그래도 아직 내가 당신에게 붙들려 있기에는 부족한 자였으니, 이는 썩어질 육신이 영혼을 짓누르고, 땅의 장막이 온갖 생각에 잠기는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음이니이다.
이리하여 나는 물체에서 혼으로, 혼에서 내적 능력으로, 혼의 내적 능력에서 다시 이성의 사유하는 능력으로 나아갔는데, 혼은 육신의 감관을 통해 물체를 지각하는 것이며, 혼의 내적 능력은 육신의 감관을 통해 지각한 것을 판단할 수 있나이다. 결국 나의 이성적 능력은 순간적으로 떨면서 눈을 떠, 마침내 존재 자체에까지 이르렀나이다.
영원한 진리되신 당신의 로고스는 실로 당신의 피조물 중 높은 것보다 지극히 높으사 순종하는 자들을 자신에게로 이끌어 올리시나, 이 낮은 세상에서는 우리를 지으신 진흙으로 겸손히 자신의 집을 지으사 우리로 하여금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배우게 하시며, 우리 자신을 버리고 그에게로 나아가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나이다.
하온데 당시 나는 플라톤 학파의 그 책들을 읽고 무형의 진리를 탐구하라는 권면을 받았던지라, 당신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롬 1:20)을 만드신 만물을 통하여 보아 알게 되었고 당신의 물리침을 받고서도 내 영혼의 어두움으로 인해 바라볼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느낌을 어렴풋하나마 갖게 되었나이다. 그러나 교만을 바탕으로 하는 그 책들은 나에게 무익하였나이다.
나는 성경 중에 바울 서신을 매우 열심히 탐독하였는데, 플라톤 학파의 책들에서 읽은 진리가 성경에 모두 들어 있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성경은 당신의 은총을 찬양하는 가운데,,,.,,,.
어거스틴은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세계사에 기록된 교회 역사에 힘 있게 기록되어진 인물이다. 그는 고백록을 통하여 16년 동안의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회개와 은혜의 차원에서 써나갔다. 그리고 43세의 현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영광을 돌리는 고백을 하였다. 이 고백록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의 내면의 세계는 곧 우리의 내면의 세계와 같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고백록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 그리고 한 단계 하나님 곁으로 다가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나에게는 조금 벅차고 난해한 책임을 알면서도 읽게 된 것은 오직 나의 신앙이 좀 더 성숙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본론
제 1 권 어린 시절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시편 145편 3절,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로 시작한다.
자기의 죄악을 가지고 다니는 자가, 한줌 피조물에 불과한 자가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나이다.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당신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나라는 존재 또한 당신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 사실이나이다. 로마서 11장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니이다.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시나이다.
당신은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않으셨으나 마치 빚을 지신 것처럼 갚아 주시나이다. 또한 빚을 탕감해 주실 때에도 당신은 아무 손해를 입지 않으셨나이다.
당신은 나의 무엇이 되시나이까? 시편 35편 3절,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그러나 내 영혼의 집은 당신이 들어오시기에 좁고 더러우므로 당신이 계시기에는 너무도 부족하나이다. 시편 32편 5절, “주께 내 죄를 아뢰었더니 곧 주께서 내 마음의 악을 사하여 주시지 않았나이까”
당신은 나를 부모에게서, 또한 그들 안에서 시간 속에 창조하셨으나 나는 기억치 못하겠나이다. 나의 유아기는 오직 당신이 그들을 통하여 나에게 젖먹이의 양식을 주시고, 행복 또한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나왔을 따름이니이다. 당신께는 덧없는 만물의 모든 원인, 변화하는 삼라만상의 불변적 근원, 또한 이성이 없는 모든 시간적 존재의 영원한 이치가 있사옵나이다. 그러므로 당신 안의 것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나이다.
모든 생명체는 당신에게로 좇아 나왔음을 고백하나이다. 당신만이 우리를 창조하셨나이다. 당신은 최고의 존재시며 최고의 생명 그 자체이심이니이다.
진실로 변함이 없으시고 지극히 높으신 당신은 항상 ‘오늘’이라는 날짜가 지나가지 않나이다. 그러나 또한 ‘오늘’이라는 날짜가 지나가기도 하는 것은 당신 안에 모든 세계가 있기 때문이니이다. 우리의 날들은 당신의 ‘오늘’을 통하여 지나갔으며 당신의 ‘오늘’로부터 척도와 존재를 부여받았나이다.
그러나 내가 망각할 수 없는 일은 시편 51편 5절,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의 말씀처럼 내가 죄 없던 때가 언제였으며 죄 없던 곳이 어디였나이까?
소년기의 나는 내 주위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언어라는 표상을 주고받게 되었사오며, 부모님의 명령과 어른들의 지도에 따라 인생의 거친 파도가 이는 사회 속으로 점점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나이다. 어른들은 올바른 생활이라며 나에게 제시된 것은 잘살기 위해서는 인간의 명예와 헛된 부귀를 얻게 하는 웅변술에 뛰어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내지 못하면 매를 맞아야만했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이일을 당연히 여기었고, 우리는 이 벌을 피하기 위해 상당히 간절히 당신에게 기도를 드려야 했습니다.
여하튼 당신의 뜻은 놀기 좋아하는 우리가 나이에 맞는 재능을 우리가 충분히 가지는 것이었나이다. 그러나 놀이에 대한 재미가 커지고 그 놀이에서 승리를 뽐내며 허구적인 이야기로 내 귀를 간질이기를 좋아해서 어른들의 놀이인 연극이나 경기를 구경하는 재미까지 구하게 되었나이다.
어머니는 세례를 연기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당장 닮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장차 그 형상대로 빚어질 수 있는 ‘진흙 덩어리’로 그냥 있는 것을 허락하고자 했나이다.
나는 애네아스를 사랑하여 죽은 디도를 애도하면서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 불쌍한 자는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웅변의 명성이나 문법이나 철자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에 온 정신을 다 쏟으면서도 원수를 미워하여 한 사람을 ‘인간 사회에서’ 소외시키는 일은 서슴없이 행하였나이다.
그러하오나 주여 당신이 나를 어린 아이로 내버려 두셨다하여도 나는 당신께 감사하나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었나이다. 이 선물로 나는 더 풍성해지고 온전해짐으로 당신이 계신 곳에 나도 함께 있게 되리니, 이는 내가 존재하는 것조차 당신이 내게 주신 것인 까닭이니이다.
제 2 권 사춘기의 분요함
고통스러운 추억을 통하여 나의 지극히 추악했던 과거의 행로를 돌이켜보는 것은 순전한 기쁨, 복되고 확실한 기쁨이 되시는 당신만을 나의 기쁨으로 삼으려 함입니다. 이제 당신을 떠나 여럿의 세계에서 망하게 되었을 때 산산조각이 나 흩어져있던 나를 거두려 하나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당신의 면전에서 내 동류 인생들에게 하는 것이니, 나나 이 글을 읽는 그 누구나 아득히 “깊은 데서”당신께 부르짖어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자는 데 있나이다.
그때 나는 당신을 멀리 떠나 궁핍한 땅을 스스로 찾아갔나이다. 그리하여 내 어머니는 내가 다른 사람의 아내와 간음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나이다. 열여섯 살 때 나의 우정이란 정욕을 불태우는 도구였나이다. 이 친구들은 함께 죄를 짓기에 적합한 자들이었으니 나는 이들과의 그릇된 우정으로 점점 더 더러워지기 시작하였나이다. 그 단적인 예로, 나는 친구들과 함께 우리 집 포도원 근처에 배나무 한 그루에서 배를 도둑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배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도둑질하는 그 자체, 죄를 짓는 것 자체가 좋아서 행한 일인 까닭이니이다. 나는 한 때나마 저속한 것으로 나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욕망에 불타있었습니다.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부패한 존재로 있었으나 알지 못하고 오직 나 자신과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기를 바랐나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죄를 짓는 이유는 무엇이나이까? 그것은 우리가 지극히 하찮은 것이라 일컬은 그 재화 중 어떤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 또는 그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사람들은 보통 생각할 것이니이다. 영예와 권세와 부를 얻게 되며, 법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게 되고, 재산의 부족에서 오는 경제적 어려움과 죄악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원했던 까닭이니이다. 그러므로 시기와 질투와 교만을 무기로 이들은 죄를 만들어가나이다. 그러나 이런 죄를 범함은 오로지 당신을 멀리 떠나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나이까? 그 멀어짐은 진리를 상실하게 하고 이 진리의 상실은 바로 당신의 사랑을 잃어버림과도 같나이다.
당신의 건전한 사랑, 당신의 보드라움, 전지하신 분, 가장 순수하시고, 무흠하신 분이심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가증한 행위를 용서하셨나이다. 그리고 당신으로 인하여 나를 순결하고 무죄하게 돌리셨나이다.
제 3 권 마니교 신자가 되다
나는 카르타고로 갔는데, 내 주변 도처에는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그릇된 사랑의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나이다. 연극은 그런 나를 사로잡았는데, 나의 비참한 모습을 비춰 주는 장면과 나에게 정욕의 불길을 일으켜 주는 화약이 가득한 것이었나이다. 연극 중에도 비극을 좋아하였는데, 이는 슬픔을 느끼게 해주고 마음껏 동정을 베풀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니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올바른 동정심을 가진 자는 오히려 아픔을 일으키는 원인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니이다.
나는 소위 ‘불량학생들’을 친구로 사귀고 있었는데, 그들의 난폭한 행동을 따라하는 것은 삼갔나이다. 주님 나를 포함한 그들이 남을 비웃고 속이는 일을 즐기기에 앞서 악마들이 먼저 저들을 비웃으며 몰래 꾀어 속이고 있었으니, 완전히 엎어지고 망하게 된 것은 사실은 저들 자신이었나이다.
그 당시 나는 수사학의 대가가 되기를 소원하였는데, ⌜호르텐시우스⌟라는 책을 통하여 내 생각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 책에는 과거와 현재의 사람들의 모두를 지적되거나 소개되고 있었으며 또 당신의 영이 당신의 선하고 신실한 종, 바울을 통하여 허락하신 다음과 같은 은혜로운 권면의 말씀을 밝혀주는 것이 들어 있었나이다.
그러나 성경은 교만한 자들에게 닫혀 있듯이 나는 성경을 읽고 실망을 느끼게 되었으니 교만함으로 가득 찬 나의 통찰력으로는 성경의 내적 의미까지 통달할 수 없었음이니이다. 그리고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지게 되었나이다. 이들은 진리에서 멀리 떨어진 자들로써, 입에서 굴러 나오는 시끄러운 소리를 낼 뿐인 군소리의 소유자들이었나이다. 내가 굶주려하는 것은 창조된 저 영적인 것들이 아니라 오직 진리 되시는 당신 자신이었으니, 당신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나는 그 때 전혀 존재하지도 않은 헛된 환영들이 그때의 내 양식이었으니, 꿈속에서 보는 음식처럼 사람에게 전혀 영양이 되지 않는 것이었나이다.
마니교는 선한원소 다섯 가지, 빛, 공기, 바람, 불, 물과 악한 원소 다섯 가지, 어둠, 연기, 나쁜 바람, 나쁜 불, 나쁜 물의 대비로 세상을 나누고 서로 다른 색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육의 시력으로 당신을 찾으려하였으나 당신은 내 안의 가장 깊은 곳보다 더 깊이 계셨고, 나의 가장 높은 곳보다 더 높이 계셨나이다.
마니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공간 안에 잡아두려고 하였고, 인간의 죄를 미끼로 하나님의 의를 시험하였나이다.
이는 하나님은 영이시며, 하나님에게는 길이나 폭을 가진 지체가 없으시며, 또한 일정한 부피를 가진 덩어리가 아니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음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또 참된 내적인 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였는데, 이의는 관습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지극히 올바른 법에 의해서 판단되는 것이오니, 이 법은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오니, 시간과 장소가 바뀐다 해도 바뀌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이 이 법에 의해서만이 의인이 될 수 있음을 몰랐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항상 똑같은 의만을 추구하시나이다. 이의는 가변적이지 않으며 시대를 초월하나이다. 그러므로 시대에 따라 하나님이 명하시는 의의 법은 단지 그 시대에 합당한 것을 명령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의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죄악의 동기는 복수심, 욕심, 시기심, 남의 고통을 즐기는 마음이 있는데, 이런 악들이 당신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나이다. 그러나 당신은 이러한 죄악을 징치하시니, 죄악을 행하는 자가 스스로를 해하도록 저를 벌하시나이다.
하나님의 판단이 인간의 판단보다 중요하니, 어떤 부분이든지 전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추하게 보이므로 자기의 정욕 때문에 관습을 깨거나 사회규범을 해치는 것이 제재를 받아야하오나, 당신의 명령은 한번도 시행되지 않았을지라도 시행해야하며, 폐지되었던 명령이라도 다시 제정해야할 것이니이다.
음식에 있어서도 마니교도들은 음식을 먹는 자가 성인이면 그 음식 또한 거룩하여 져서 성인이 말을 하거나 숨을 쉴 때에 하나님의 조각들을 내어놓는 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이다.
하오나 당신은 어머니의 눈물을 멸시치 않으셨으니, 꿈으로 희망을 심어주셨나이다. 어머니는 꿈속에서 나무로 된 자위에 서 있는 자신을 보았는데, 빛나는 옷을 입은 청년 한 사람이 어머니를 보고 왜 슬퍼하는지를 물었고 어머니는 자식의 타락으로 인한 괴로움을 말하셨는데, 그 청년은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어머니가 있는 곳에 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머니와 내가 나란히 그 자위에 서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나이다. 그 후로 어머니는 내가 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 안에 내가 언젠가는 꼭 함께 할 것이라는 확신에 찬 믿음을 잃지 않으셨나이다. 또한 어머니는 어느 감독에게 나에게 권면할 것을 부탁하였는데, 거절을 당하셨나이다. 그 이유인 즉 이단의 가르침에 빠진 자에게 권면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그만 가시오! 그대의 삶을 두고 이르노니, 눈물의 아들은 결코 망하지 않소.’
제 4 권 마니교의 늪에서
내 나이 열아홉부터 스물여덟까지 9년 동안 우리는 여러 가지 욕심에 휩싸여 스스로 시험을 받고 또 남을 시험하는 일을 하는 자들이었으며, 스스로 속임을 받고 또 남을 속이는 일을 하는 자들이었사오니, 표면적으로는 소위 ‘자유자들을 위한 학문’이라는 것을 통하여, 그리고 이면적으로는 ‘종교’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가지고 그러한 일을 했었나이다. 그 무렵 나는 수사학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말로 남을 이기는 재주를 파는 것이었나이다. 또한 어떤 여자와 동거를 시작하였는데, 정욕으로 찾아낸 여자였나이다. 나는 그 여자에게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애정을 쏟아부었나이다.
또한 점성가들을 찾아가는데도 나는 주저하지 않았나이다. 나의 친구인 네브리디우스의 권면도 소용이 없었으니 점성술 책을 쓴 사람들의 권위가 나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니이다. 그러나 이들의 대답이 올바른 대답을 하는 것이 우연이나 예언의 힘에 의한 것이지, 별 하늘을 관찰하는 그들의 기예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증명해주는 확실한 책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때까지는 아직 찾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나이다.
참된 우정이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 바”(롬 5:5)된 사랑으로 인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당신이 서로 맺어 주실 때만 성립될 수 있음이니이다.
나는 고향에서 나와 학문적인 관심이 같은 친구를 얻었는데,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친구였나이다. 나는 그 친구를 마니교의 신화 속으로 빠져들게 하였나이다. 그러나 일년도 되지 않는 우정을 뒤로 하고 당신의 부름에 하늘나라로 갔나이다. 다행인 것은 그가 세례를 받아들이고 떠났다는 것이나이다. 나는 그 친구로 인하여 자유하니 당신이 거두셨기 때문이니이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오직 눈물만이 달콤하게 느껴졌으니, 그 친구 대신 눈물이 내 영혼의 유일한 낙이 되었나이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 흘린 눈물은 달콤하며 이 달콤함은 당신이 혹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실지 모른다는 희망 때문임은 아닌지요? 그러나 그 때의 나의 눈물은 쓰디쓰고 슬픈 눈물이었으니 기쁨을 잃어버린 까닭이니이다.
우리 영혼은 이렇듯 사라져 없어질 것을 사랑하다 그것을 잃으면 깊은 상처를 받아 불행을 느끼나, 실상은 사라져 없어질 것을 사랑하는 영혼은 이미 그것을 잃기 전부터 불행한 상태에 있었나이다. 나는 그런 상태에 있었나이다.
나는 그를 위해 나의 생명을 바꾸고 싶었으나, 저를 위해 나의 생명을 완전히 잃고 싶지는 않았음이니이다. 내 마음속에 죽도록 살기 싫고, 그러면서도 정작 죽기는 정말 싫은, 이렇게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감정이 왜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나이다. 생각건대 내가 그 친구를 사랑하면 할수록 내게서 그를 앗아간 죽음을 가장 흉측한 원수처럼 미워하게 되었나이다. 분명한 것은 그 친구의 ‘제2의 영혼’이었던 내가 그 친구가 죽었음에도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었나이다. 아마도 나마저 죽으면 내가 그처럼 뜨겁게 사랑했던 그 친구가 온전히 죽지나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니이다.
나는 다시 카르타고로 갔나이다. 그러나 나 자신이 나에게 불행의 터전이 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나이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을 피하여 달아날 곳이 실로 어디겠나이까? 내가 나 자신을 피해 어디로 달아나리이까? 내가 어디로 간들 내가 나를 따라가지 않겠나이까? 그런 와중에도 나는 시간의 오고 감을 통하여 나의 마음속에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추억을 심어주었사오니, 점차 옛날에 즐기던 일을 다시 즐기게 되었고, 그로 인해 나의 슬픔이 조금씩 가라앉게 되어 평온을 되찾게 되었나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자, 친구를 당신 안에서 사랑하는 자, 원수를 당신 때문에 사랑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이는 오직 이러한 사람만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잃지 않게 되는 까닭이니, 저는 누구를 사랑하든지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는 그분 안에서 사랑함이니이다. 잃어버리는 것은 당신을 떠나는 자 외에는 당신을 잃는 자가 아무도 없으나, 당신을 떠난다 해도 다시 진노하시는 당신께로 갈 뿐이 아니니이까?
사라져 없어질 것은 참된 안식을 주지 못함이니, 모든 것이 다 노쇠해지지는 않으나 사멸하기는 다 마찬가지라. 그러므로 저들은 생성함으로 존재를 추구하나, 저들이 존재를 위하여 빨리 성장하면 할수록 저들은 그만큼 더 빨리 비존재를 향하여 가게 되나이다. 이는 어떤 단어가 일단 발음된 다음에 없어지지 아니하면 다른 단어가 이어지지 않아 온전한 문장으로 된 말이 될 수가 없음이니이다. 만물들은 우리가 영혼 속에 그릇된 욕심을 일으켜, 그것을 망하게 하오니, 이는 영혼이란 그것이 사랑하는 것 속에 있고 싶어 하고 그 안에서 쉬기를 원하는 까닭이니이다. 그러나 예정된 출발점에서 예정된 종착점까지 달려가는 만물들을 붙들기에는 그 힘이 충분치 않나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에 참된 안식은 없나이다.
그러므로 내 영혼아, 하나님의 진리인 그곳에 모든 것을 맡기라! 네게 있는 모든 것은 진리에서 온 것이니, 진리에 모든 것을 맡기라! 그것들이 너와 더불어 영원토록 굳게 설 것이니, 곧 영원토록 굳게 서 계시는 하나님 곁에서 그러할 것이라. 내 영혼아, 어찌하여 너는 그릇되게 네 육신을 좇느냐? 돌이키라! 네가 육신을 통하여 감지하는 것은 부분적인 것이라. 너는 부분적인 것의 근원이 되는 온전한 것을 몰라서 부분적인 것을 즐거워하는 도다. 그러나 부분이 모여서 전체를 이루는 도다. 하지만, 어떤 것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적인 요소들이 동시에 존재하지는 않도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것을 감지할 수만 있다면 부분적인 것보다는 전체적인 것이 더 많은 즐거움을 주도다.
아름다운 육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서 그것을 사랑하라! 이는 그것이 가변적이어서 하나님의 붙드심을 받을 때만 요동치 않으며, 만일 그렇지 못할 때는 덧없이 멸망함이라. 하나님은 지으시고 멀리 떠나시는 분이 아니니,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으며, 또한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느니라. 그러나 우리의 심령은 복된 삶을 죽음의 곳에서 찾고 있으나, 거기에는 그런 것이 없도다. 삶조차 없는 곳에 복된 삶이 어찌 있을까 보냐? 그리하여 우리의 참된 생명 되시는 그분이 몸소 이 세상에 내려 오사 우리의 죽음을 당담하시고 자신의 풍성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없이 하셨도다. 이는 그가 쉼 없이 달리시며, 우리를 향해 자기에게로 돌아오라 외치시되 말씀과 행동, 죽음과 삶, 지옥하강과 승천을 통하여 외치심이라. 그러므로 그는 떠나셨으나 실상은 우리에게서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음이니이다.
당시 나는 낮은 단계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나이다. 내가 자세히 사물을 살펴보니, 어떤 것은 그 사물 자체가 아름답고, 어떤 것은 조화를 잘 이루어서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있나이다. 나는 이 아름다움을 위하여 책을 썼는데, ⌜아름다움과 조화에 관하여⌟라는 책을 두권 썼나이다. 그 때 내 나이는 스물예닐곱 되던 해였을 것이다.
나는 그 책을 로마의 수사학자 히에리우스에게 바쳤나이다. 이는 저가 시리아 사람으로서, 처음에는 헬라 수사학에 능통하더니, 라틴 수사학에 대해서도 놀라우리만큼 탁월하였고 철학에 관한 지식도 매우 해박하였음이니이다. 나는 그에게 인정을 받기를 갈망하였나이다. 나는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나이다. 그 때는 잘 몰랐지만, 내가 저를 사랑하고 본받으려는 욕망은 저를 칭송하는 사람들의 저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나이다. 그의 인간됨 자체는 달라진 것이 전혀 없으며, 오직 그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들의 생각만이 달라진 것이니이다. 그러므로 칭찬은 사람의 마음에 거짓이 없다고 여겨질 때, 곧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칭찬할 때만 칭찬받는 사람이 사랑받는 사람도 되는 것이니이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을 사랑할 때, 사람들의 판단을 따라 해서는 안 되고 오직 당신 안에서만 우리는 속임을 당하지 않나이다.
내 영혼은 그 책을 쓸 때에 사물의 형상만을 좇아갔으니, 덕에는 일치가, 악덕에는 일종의 분리가 있다고 보았나이다. 그리하여 일치는 이성적 영혼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 속에 진리나 최고선의 본질이 있고, 분리는 비이성적 삶에 속하는 것으로서 잘은 모르지만 그 속에 최고악의 실체 내지 본질이 있다고 생각했나이다. 그때 나는 비록 최고악이 당신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가련하게도 최고악이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 생명까지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나이다. 그리하여 나는 일치를 마치 성별이 없는 이성처럼 ‘단일자’라 부르고, 분리는 폭행할 때의 분노나 음행할 때의 정욕처럼 ‘중첩자’라 불렀으니, 이는 악은 어떠한 실체도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이성 역시 변함없는 최고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알지도 배우지도 못했음이니이다.
무릇 행동의 바탕이 되는 영혼의 움직임이 왜곡되어 오만하고 거칠어질 때 포악한 행동을 하게 되고, 영혼의 정념이 절제를 잃고 육신의 쾌락을 추구할 때 음행을 하는 것같이, 이성적 영혼이 혼탁해질 때 그릇되고 거짓된 생각들이 우리의 삶을 더럽히게 되나이다. 그러므로 어떤 다른 빛으로부터 조명을 받아야 했으나,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맛본 것은 죽음뿐이니이다. 나는 내가 본질적으로 당신과 같은 존재라는, 주장으로 당신도 나처럼 가변적인 존재임이 분명하다고 생각을 하였나이다. 나는 감각적인 형상만을 상상했고, 내 안에도, 물체 안에도 존재하지 않는 허망한 것 사이를 헤매고 다녔나이다. 그 허망한 것이란 당신의 진리가 나를 위해 창조한 것이 아니라 감각적 세계가 제공하는 허상을 따라 나의 망상이 지어낸 것이었나이다.
내 나이 스물 살쯤 되던 해 나의 수중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십범주론⌟이라는 책이 들어왔는데, 내가 보기에 그 책은 실체와 그 속성에 관하여 논하는 것이 분명하였나이다. 예컨대 사람이라는 실체에 있어 그의 성질은 어떠한지, 그의 키는 몇 자인지, 혈족 관계로는 누구의 형제인지, 그가 어떤 장소에 있는지,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 그가 서 있는지, 앉아 있는지, 신을 신고 있는지, 무장을 하고 있는지, 또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를 말할 수 있는데, 모든 것은 내 방금 예시한 대로 아홉 가지 범주에 속하든지, 아니면 실체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니이다.
이는 모든 존재를 이 열 개의 범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 인해, 신묘하게 순수하시며 불변하시는 당신까지도 그러한 방식으로 파악해 보려 했음이니이다. 그리하여 당신을 크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실체로 생각하였나이다. 마치 어떤 물체가 무슨 속성을 지니는 것처럼 당신도 크기라는 속성, 아름다움이라는 속성을 지니는 어떤 주체라고 생각하였나이다. 하오나 당신이야말로 당신의 크기 자체시며, 당신의 아름다움 자체가 아니시니이까?
나는 또 소위 ‘자유학예’에 관한 책들을 내가 구해서 읽을 수 있는 대로 모두 읽고 나 혼자의 힘으로 이해할 수 있었으나, 내게 무슨 도움이었겠나이까? 나는 그 책들을 읽고 기뻐했으나, 그 속에 있는 모든 참된 것, 모든 확실한 것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나이다. 이는, 내가 빛에 등을 돌리고, 빛의 조명을 받는 것들에 얼굴을 향하였음이니이다. 나는 내 얼굴을 향하여 빛의 조명을 받는 것들은 바라볼 수 있었으나, 정작 나 자신의 얼굴은 빛의 보명을 받지 못하였나이다.
나의 빠른 이해력이나 날카로운 통찰력은 당신의 선물이니이다. 하오나 나는 그것으로 인해 당신께 감사와 찬송의 제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나이다. 오히려 당신을 공공연히 모독하면서 당신을 향해 개처럼 짖어 대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사오니, 그러므로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해가 되었나이다.
당신만이 우리의 참 능력이 되시는 까닭에, 만약 우리가 홀로 있다면 우리의 능력은 오히려 무능력이 됨이니이다.
제 5 권 마니교와의 결별
나의 혀라는 손을 사용하여 당신께 드리는 나의 이 찬양과 고백의 제사를 받아 주소서! 당신의 모든 피조물이 쉼 없이 소리 높여 당신께 찬양을 드리니이다. 그러나 당신을 보지 않으려고 도망하지 않는 자들은 눈이 어두워 당신께 부딪혔사오니 이는 당신이 만드신 것을 당신이 하나도 버리지 않으심이니이다. 불의한 저들은 당신께 부딪혀 저들에게 합당한 벌을 받고 말았사오니, 저들은 당신의 온유하심을 피해 달아나다가 당신의 공의로우심에 부딪혔고, 당신의 지엄한 진노 아래 떨어지게 되었나이다.
당신이 나를 찾으실 때 나는 당신 앞에 있었사오나 내가 나 자신에게 멀리 떠나있었던 까닭에 당신을 발견하지 못했나이다. 그러나 주여, 당신은 모든 것들의 창조자시니, 당신은 이제 저들을 재창조하시고 또 위로하시나이다.
내 나이 스물아홉 살 시절을 나의 하나님께 아뢰려 하나이다. 파우스투스는 마니교의 어떤 감독으로 ‘마귀의 올무’였으나 나는 그를 만나기를 갈망하였나이다. 그는 순수학문에 조예가 매우 깊고, 특히 자유학예에 뛰어나다는 것이었나이다. 나는 그 당시 언변과 진리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이다. 그래서 명성이 높은 파우스투스의 지식에 더 주목하였나이다.
철학자들은 저들이 가진 이성과 당신이 저들에게 주신 재능을 사용하여 많은 것을 발견해 냈으니, 예컨대 일식과 월식이 일어날 날짜와 시간과 범위를 여러 해 전에 미리 말하매, 저들이 말한 것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저들이 말한 그대로 이루어졌나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어둠은 보지 못하나니 이는 저들이 이러한 것을 연구하는 저들의 재능이 어디서 오는지를 경건한 마음으로 궁구하지 않는 까닭이니이다. 마니는 이런 것들에 관하여 많은 글을 썼으나, 그 내용은 너무나 허황된 것으로 가득 차 있었나이다. 즉 하지와 동지, 춘분과 추분, 일식과 월식 등에 관하여 그가 쓴 내용은 세속 철학자들의 책에서 내가 배운 내용과는 달리 타당성이 전혀 없었나이다. 마니는 그저 믿기만 하라고 했으나, 그가 믿으라는 내용은 내가 수학적으로 계산해보고 내 눈으로 관찰해 본 것과는 전혀 맞지 않고 동떨어진 내용이었나이다.
사람의 진정한 행복은 당신을 앎으로 얻어지나이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지식이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이 내대신 알아서 다해주시니 당신을 아는 것은, 나보다 뛰어난 자보다 더 행복하게 하나이다.
하온데 마니는 스스로를 학자라, 스승이라, 지도자라, 두령이라 하면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당신의 성령이라 믿고 따르기를 요구하나, 저의 말이 거짓임이 밝혀질 때 누가 이런 광증을 혐오해야 할 것으로, 또 멀리 떨쳐 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겠나이까?
파우스투스는 문법을 제외하면 자유학예에 대해서는 별다른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나이다. 문법교육도 평범한 수준에 불과하나이다. 그러나 나는 자기 자신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 자세가 내가 원하던 지식을 획득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졌음이니이다. 그러나 그와 대화를 자주 가지므로 인해 나는 그의 올무에서 점점 벗어나게 되었나이다.
나는 어머니를 속이고 로마로 가서 카르타고에서 가르치던 것을 가르치기로 결심한 것은 당신의 뜻이니이다. 그때 나는 카르타고에서는 현실의 불행을 혐오했으나, 로마에서는 거짓된 행복을 추구하였나이다. 어머니의 고통은 더해졌으나 하나님은 나를 그대로 내버려두셨나이다. 그래서 첫째, 나의 정욕으로 나를 붙들어 가게 하사 정욕 자체를 없애시고, 둘째, 어머니의 육신적 욕심에는 슬픔이라는 온당한 채찍으로 징벌을 가하고자 하셨음이니이다.
나는 로마에서 병이 들어 원죄라는 사슬 뿐 아니라, 그 밖의 수많은 무거운 죄악을 짊어지고 ‘음부로’(욥7:9) 내려가고 있었나이다. 그러나 나를 불쌍히 여기사 내 육신의 건강을 회복시키셧는데, 당신을 거역하는 내 심령은 여전히 병들어 있었나이다. 아! 당신은 당신이 행하려고 예정하신 일을 순서에 따라 행하고 계셨나이다. 나는 아직도 내가 죄인이 아니라는 생각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나의 죄악은 더욱 고치기 어려운 것이 되어 갔나이다.
마니교는 하나님을 지체가 있는 형상으로 보았으나 나는 인정하지 않았나이다. 그러나 큰 물체 덩어리로밖에는 생각할 줄 몰랐으니, 악도 그와 같은 실체로서 추하고 보기 흉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였나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악을 서로 적대적인 두 개의 물체 덩어리를 상정하였나이다. 이것은 성육신하신 당신을 믿는 것보다 더 경건하다고 생각을 하였나이다.
나는 신약성경은 유대교의 율법을 기독교 신앙에 접목시키고자 누군가가 위조한 것이라 하였나이다.
거칠고 난폭하고 무례한 카르타고 학생들을 피하여 로마로 갔으나 그들은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었나이다.
그때에 나는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를 만나게 되었나이다. 그는 말하는 솜씨는 파우스투스보다 재미가 덜하지만, 학식이 더 풍부하게 배어 나와 듣기에 유쾌하였나이다. 더구나 그 내용을 보면 비교도 되지 않았나이다. 파우스투스는 마니교의 거짓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헤매는 자였다고 한다면, 암브로시우스는 구원의 도리를 지극히 건전하게 가르치는 자였기 때문이었나이다. 그러므로 그가 어떻게 말을 잘하는지 듣기 위하여 내가 마음을 열었을 때, 그가 말하는 참된 내용도 동시에 들어왔나이다. 물론 그 일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니이다. 그러는 중에 나는 최소한 마니교도들과 결별해야겠다는 결심만 굳히게 되었고, 철학자들에게 내 영혼의 병을 치료해 달라고 맡기는 일을 그만두었으며, 부모님의 당부대로 보편교회의 학습교인의 지위를 유지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아직 나는 영적인 실체에 대해 이해력이 부족하여 거짓된 이론을 내 마음에서 완벽하게 몰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니이다.
제 6 권 정신적 방황의 계속
어머니는 나를 만나러 밀라노로 오셨나이다. 그때 나는 실로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에 심한 위기에 처해있었나이다. 그러나 오류에서는 이미 벗어났을 때이니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도의 응답을 평온함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더욱 간구하여 진리에 이르기를 갈망하였나이다. 또한 나를 변화시키는 암브로시우스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씀을 사모하여 열심히 교회를 찾아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마셨나이다. 또한 성인의 기념관에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는 습관을 암브로시우스에 의해 기쁨으로 버렸나이다. 그 포도주는 사람을 취하게 하였기 때문에 암브로시우스는 금지령을 내리게 되었나이다.
나는 당신의 말씀이라는 양식이 마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입에 되새김질할 때 어떠한 기쁜을 맛보는 것인지 몰랐으므로, 당신께 간절히 기도하기보다는 학문에만 몰두하고 논쟁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나이다. 암브로시우스는 바쁜 사람이라 그와 단독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였나이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점점 하나님의 말씀을 거슬러 악의에 찬 모함으로 엮어 놓은 모든 매듭을 풀 수 있다는 확신이 점차 더 커졌나이다. 나는 내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반대해 왔던 것은 보편교회의 정통신앙이 아니라, 육신적인 생각이 만들어 낸 허상인 것을 그제야 깨닫고 부끄러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나이다.
그러나 신자가 되는 것은 두려운 모험과도 같은 것이었나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여지껏 내가 맹렬히 비난하던 것을 교회가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으며, 구약성경의 율법과 선지자들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며 읽게 되었다는 것이니이다. 나의 판단은 중지를 당하고 말았나이다. 그것으로 인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나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내가 알고 있는 많은 것들 현장속에 내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믿지를 않는다면 어느 것 하나 완전하게 없었나이다. 내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조차도 내가 믿지 않는다면 알 수 없었던 일이 충분히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나이다. 그러므로 비록 당신이 대체 어떠한 분인지 모를지언정, 당신이 계시다는 사실과 인간 만사를 다스리심이 당신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게 만든 일은 없었나이다. 단지 당신의 본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당신께로 가는 길은 어떠한 길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나이다.
아! 당신은 진리시며 당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은 성경을 통해서 당신을 믿는 이것이니, 그때에는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 아닌 것, 명예와 부와 결혼의 추구로 얻어지는 즐거움을 당신은 허락하지 않으심으로 나에게 은혜를 더하셨사오니, 당신은 나를 끈적끈적한 죽음의 끈끈이에서 떼어 주셨음이니이다. 나는 골목길에서 본 돈 몇 푼에 기쁨의 웃음을 짓는 거지를 부러워했는데, 그 거지가 가졌던 기쁨이 참된 기쁨이라서기보다는 내가 추구했던 야망이 훨씬 더 허망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나이다. 내가 느끼는 기쁨은 학문 자체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들 기쁘게 해 주는 것을 추구하는 기쁨이었기 때문이었나이다. 그 거지와 마찬가지로 내가 추구하던 영광도 참된 영광은 아니었음이니이다. 믿음의 소망에서 오는 기쁨과 헛된 것에서 오는 기쁨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차이가 있나이다.
나는 그때에 귀중한 친구 둘을 얻게 되었는데, 알뤼피우스와 네브리디우스였나이다. 그 중 알뤼피우스는 나와 같은 도시출신으로 타가스테에서 내게서 배웠고 내가 착하고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해 나를 무척 사랑하였나이다. 그는 원형극장을 광적으로 좋아했는데, 내 강의를 듣고 굳센 절제력을 발휘하여 영혼을 가다듬었으니, 원형극장의 더러운 것은 저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그 후 그는 결코 그곳을 가지 않았나이다.
마니교 신자들이 자랑하는바 절제라는 것을 참되고 순수한 것이라 믿고 사랑했던 까닭이니이다. 하오나 그것은 사람을 기만하는 광적인 절제로서, 아직 참다운 덕의 깊이를 알지 못하여 겉모양에 속기 쉬운, 그러나 귀한 영혼들을 가장된 덕의 허울로 사로잡는 것이었나이다. 그러나 알뤼피우스는 또 다시 검투 경기에 탐닉하게 되었나이다. 저의 영혼이 이렇게 연약했던 것은, 저가 당신을 의지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의지했던 탓이니이다. 저는 피를 보자마자, 그 피를 야만인처럼 들이마시게 되었사오니, 그 사악한 투기를 즐기며 잔혹한 쾌락에 흠뻑 취하고 말았나이다. 하오나 당신은 지극히 강하고 자비로운 손으로 저를 거기에서 건져 주사, 저로 하여금 자신을 믿지 않고 오직 당신만을 믿도록 가르쳐 주셨는데, 이는 한참 후의 일이니이다. 알뤼피우스는 한 때 도둑으로 몰린 적이 있었는데, 저가 송사를 취급할 때, 남의 말을 경솔히 믿고 사람을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우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이 알뤼피우스를 나는 로마에서 다시 만났고, 그는 나와 깊은 우정으로 맺어져 나와 함께 나와 함께 밀라노로 가게 되었으니, 그 첫째 이유는 나와 떨어져 있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그의 부모의 뜻을 따르기 위함이니, 그는 이미 세 번이나 배석판사로 있으면서 청렴결백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나이다.
네브리디우스도 나와 함께 지내면서 불타는 열심히 진리와 지혜를 탐구하자는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은 없었나이다. 복된 삶을 열심히 추구하고 지극히 어려운 문제를 예리하게 궁구하는 자였던 저는 우리와 함께 탄식과 방황을 같이 나누었나이다.
나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방황을 계속하였으니, 그 당시 벌써 나이 삼십이었으나, 아직도 예의 그 진흙탕에 빠져 나를 흐트러뜨리며 도망치는 현세적 재화를 즐기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이렇게 독백하고 있나이다. ‘···보라 파우스투스가 와서 모든 것을 밝혀 주리라.···성경책에서 불합리하게 보였던 부분들이 이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구나···인생은 비참하고 죽을 때를 모르나니, 죽음이 갑자기 찾아오면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 이승을 떠나게 될까?’ 나는 이런 마음의 요동함 속에서 하나님 안에서 사는 일을 미루고 있었나이다.
나는 안정을 찾기 위해 결혼을 생각했으나, 알뤼피우스는 적극 만류를 했다. 그 이유는 지혜의 탐구를 계속할 수 없음을 말했다. 그러나 그도 점차 나에게 동화되어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나이다. 하온데 우리는 둘 다 집안을 다스리고 자녀를 기른다는 결혼한 사람들의 신성한 의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나이다. 도리어 나는 채워지지 않는 정욕을 채우려는 습관에 사로잡혀,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는 호기심으로 인하여 종살이로 끌려가고 있었나이다.
어머니는 내가 날마다 조금씩 세례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 가고 믿음의 진보를 보이게 되자, 자기의 소원과 당신의 약속이 성취되어간다는 생각에 기뻐했나이다.
그러는 중에도 우리는 공동생활을 꿈꾸었는데, 괴롭고 소란한 인간 생활이 몹시 싫어져서 y속세를 떠나 조용한 생활을 해 보자는 생각에서였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계획으로 끝나고 말았고, 나는 동거녀와 헤어지기로 결심을 하였나이다. 그녀는 아들을 두고 아프리카로 돌아갔나이다.
나의 구원이 가까울수록 고통은 심해졌나이다. 특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 장차 있을 당신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뿐이었나이다. 이러한 생각이 크나큰 불행의 원인인 줄 모르고 나는 수렁 속에 깊이 빠져 장님이 된 채, 덕과 아름다움이라는 빛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 빛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는바,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심령 깊은 곳에 있는 영혼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니이다.
제 7 권 플라톤주의의 영향
악하고 죄 많던 내 청년기는 이미 지나가고 장년기에 접어들었는데, 당신을 지극히 높으시고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으로 생각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당신은 썩지 않으시고 손상 받지 않으시며 변함이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에서부터 믿었나이다. 왜, 어찌해서 그렇게 믿고 생각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으나, 한 가지 밝히 보고 확신했던 것은 썩는 것이 썩지 않는 것보다 못하고, 손상 받지 않는 것이 손상 받는 것보다 물론 더 낫고, 변하지 않는 것이 변하는 것보다 더 좋다는 사실이었나이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일정한 공간 안에 연장돼있거나, 전개돼있거나, 집중돼있거나, 팽창돼있거나 하지 않는 것은, 또 어떤 물체를 수납하지 않거나 수납할 수도 없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였나이다. 그러나 만약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땅의 부분 가운데서 크기가 더 큰 것은 당신을 더 많이 차지하고, 작은 것은 당신을 덜 차지하게 되며, 모든 것이 당신으로 가득 차 있되 코끼리는 참새보다 당신을 더 많이 차지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됨이니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몸집이 큰 것일수록 당신을 더 많이 차지하게 되어, 당신은 세상을 이루는 여러 부분에 대해 큰 것에는 크게, 작은 것에는 작게 나누어져서 임재하게 되나이다. 물론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나이다. 하오나 당신은 아직 ‘내 흑암을’ 밝히시지 않았나이다.
마니교도들은 싸움이 생기는 것은 당신의 한 부분, 당신의 지체 하나, 또는 당신의 본체에서 태어난 어떤 소생이 거스리는 세력 내지는 당신에 의해 창조되지 않은 본성과 혼합됨으로 인하여 심히 부패하고 변화하여 악한 것이 되며, 결국 행복한 상태에서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는바, 구원과 정화를 위하여는 도움이 필요한 연고라는 것이니이다. 또한 그들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영혼인바, 이 억압받고 더럽혀지고 타락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당신의 자유롭고 순결하며 온전한 로고스가 오셨으나, 로고스도 영혼과 동일한 본체에서 나왔기 때문에 썩어질 수 있다는 것이니이다. 그러나 당신에게 어두움의 세력이 무슨 해를 끼칠 수 있다면, 당신은 상함과 썩음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니, 이는 정녕 처음부터 거짓되고, 첫 마디부터 가증스러운 것이니이다.
또한 저들이 악의 원인을 탐구하나, 저들 자신이 악을 행한다고 생가하기보다는, 당신의 본체가 악의 침애를 받는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했나이다. 하온데 나를 당신의 빛으로 끌어올려 주는 것이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의지를 가졌다는 것이 내가 살아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는 확실하다는 사실이었나이다. 그리하여 내가 무엇을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그 의지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나 확실히 알게 되었으며, 바로 여기에 내 죄악의 원인이 있음도 점차 깨닫게 되었나이다.
하나님은 불변적이시므로, 하나님의 의지와 권능은 실로 하나님 자신이니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아시는 당신에게 무슨 우연이 있으리이까?
나는 또 악은 어디서 오는지 그 근원을 찾고 있었으나, 내가 그것을 찾는 방법이 악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나의 탐구 그 자체에 있는 악을 보지 못하였음이니이다. 나는 당신의 피조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보았으며, 그것이 아무리 크다 해도 모든 면에서 유한한 것이라고 생각했나이다. 진실로 악은 어디에 존재하며, 어디서 어떻게 여기까지 침투해 왔는가? 그것의 뿌리는 무엇이며, 그것의 싹은 어디서 났는가? 혹은 악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악을 두려워하며 무서워하는가? 혹은, 우리가 만약 공연히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두려움 그 자체가 분명 악이라. 까닭 없이 마음에 불안과 고통을 안겨 주니 말이다. 만약 악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은 왜 하필 그런 질료로 무엇을 만드시려 했을까? 그의 전능하심으로 오히려 그런 악한 질료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는 없었을까? 아니면 혹시 그 악한 질료가 그분의 뜻을 거슬러서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점성술의 거짓된 점술과 불경한 망령과도 이미 관계를 끊었나이다.
그러나 나의 영혼은 ‘악은 어디서 오는가?’로 계속해서 불안에 떨고 있었나이다. 그러나 당신의 실체는 불변적이라는 것을 믿었으며, 인간에 대한 당신의 돌보심과 심판을 믿었고, 당신은 인간을 위하여 장차 사후에 생명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길을 당신의 아들이시며 우리 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하셨음을 당신이 보편교회에 맡기신 성경의 권위에 의지하여 믿었나이다. 당신을 향해 가는 믿음의 도약의 혼돈으로 나는 얼마나 심한 해산의 고통을 겪었는지요? 내 영혼의 소리 없는 고통은 당신의 긍휼을 간구하는 크나큰 부르짖음이었나이다.
플라톤의 책들은, 당신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는 사실과 사람들에게 겸손의 길을 보여 주시기 위해 긍휼을 베푸사, 당신의 로고스로 하여금 “육신의 되어”(요 1:14) 사람들 가운데 거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나이다. 거기에는 아들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빌 2:6) 아니했다는 내용은 들어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승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었나이다. 또한 하나님이신 로고스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 1:13)이심은 말하고 있으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요 1:14) 거하신다는 것은 읽지 못하였나이다. 그 책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롬 1:22) 어두워져,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롬 1:22) 되었나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 책들을 통해 나 자신으로 돌아가라는 권면을 받았나이다. 그러므로 나는 영원한 진리의 빛에 가까이 나아가나이다. 나는 불변의 빛을 보았는데, 이 빛이 나보다 높은 것은 이 빛이 나를 창조했기 때문이요, 내가 이 빛보다 낮은 것은 내가 이 빛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니이다. 무릇 진리를 아는 자는 이 빛을 알며 무릇 이 빛을 아는 자는 영원을 아나이다. 무릇 참된 사랑은 이 빛을 아나이다. 나는 진리가 유한한 공간이든 무한한 공간이든 공간에는 퍼져있지 않으니,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 무인가? 그러나 당신은 나에게 외치시나이다. ‘아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한 당신에게로 온 피조물의 본성은 온전한 존재도 온전한 비존재도 아님을 깨닫나이다. 그것들이 존재하는 것은 당신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며,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당신과 같은 수준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니이다.
그러나 나는 썩음을 입는 것들도 선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나이다. 그러나 썩음으로 선이 상실되는 것은 분명 해가 되는 것인데, 최고선은 전혀 썩을 수 없고, 전혀 선하지 않은 것에는 그 안에 더 이상 썩을 수 있는 것이 없음이니이다. 그런즉 존재하는 것은 선한 것이니이다. 그리하여 존재하는 것은 다 선하니, 내가 그 근원을 캐묻던 악은 실체가 아니니이다. 그리하여 나는 당신이 만드신 만물은 다 선하며, 당신이 창조하지 않은 실체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고 깨달았나이다.
하온데 부분의 관점에서 보면, 피조물 중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악으로 취급되나이다. 하오나 그것이 또 다른 것에는 조화를 이루어 선한 것이 되니, 그 자체로서는 선한 것이니이다.
나는 두 가지 본체를 주장하는 이론에 빠져 안식을 찾지 못하고 어리석은 말만 하였나이다. 그리고 이원론을 버린 후에는 무한한 공간 속에 두루 퍼져 있는 하나님을 상정하여 믿었나이다. 그러나 당신은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시 119:37) 못하게 하셨나이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이런 상태에서 조금 벗어났고, 나의 광기도 가라앉게 되었나이다.
그리고 눈을 돌이켜 다른 것들을 살펴보니, 그것들이 당신으로 말미암아 존재함과 당신이 그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심을 깨달을 수 있었나이다.
나는 죄가 무엇인가 궁구해본 결과, 그것은 무슨 실체가 아니라 의지의 왜곡임을 깨달았나이다. 곧 최고의 실체이신 하나님 당신에게서 돌이켜 자기 내면 아주 깊숙한 곳에 감추어진 보배를 버리고 밖으로 부풀어 올라, 지극히 비천한 데로 떨어지는 것임을 깨달았나이다.
나는 어느덧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는데, 그래도 아직 내가 당신에게 붙들려 있기에는 부족한 자였으니, 이는 썩어질 육신이 영혼을 짓누르고, 땅의 장막이 온갖 생각에 잠기는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음이니이다.
이리하여 나는 물체에서 혼으로, 혼에서 내적 능력으로, 혼의 내적 능력에서 다시 이성의 사유하는 능력으로 나아갔는데, 혼은 육신의 감관을 통해 물체를 지각하는 것이며, 혼의 내적 능력은 육신의 감관을 통해 지각한 것을 판단할 수 있나이다. 결국 나의 이성적 능력은 순간적으로 떨면서 눈을 떠, 마침내 존재 자체에까지 이르렀나이다.
영원한 진리되신 당신의 로고스는 실로 당신의 피조물 중 높은 것보다 지극히 높으사 순종하는 자들을 자신에게로 이끌어 올리시나, 이 낮은 세상에서는 우리를 지으신 진흙으로 겸손히 자신의 집을 지으사 우리로 하여금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배우게 하시며, 우리 자신을 버리고 그에게로 나아가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나이다.
하온데 당시 나는 플라톤 학파의 그 책들을 읽고 무형의 진리를 탐구하라는 권면을 받았던지라, 당신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롬 1:20)을 만드신 만물을 통하여 보아 알게 되었고 당신의 물리침을 받고서도 내 영혼의 어두움으로 인해 바라볼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느낌을 어렴풋하나마 갖게 되었나이다. 그러나 교만을 바탕으로 하는 그 책들은 나에게 무익하였나이다.
나는 성경 중에 바울 서신을 매우 열심히 탐독하였는데, 플라톤 학파의 책들에서 읽은 진리가 성경에 모두 들어 있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성경은 당신의 은총을 찬양하는 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