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下)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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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8 17:47
기록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누구든지 보는 사람은 자기가 보는 대상뿐만 아니라 볼 수 있는 시력까지도 위로부터 받은 만큼, 마치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지 말아야 하나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이므로,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당신의 은혜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경건의 표현인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하소서.
제 8 권 회심을 위한 마지막 싸움
당신의 말씀은 이제 내 마음속 깊이 자리잡아, 나는 사방에서 당신으로 둘러쌈을 당하였나이다. 당신은 불멸의 실체시며, 다른 모든 실체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의심도 사라졌나이다. 그리하여 내가 당시 바랐던 것은 당신에 대하여 더욱 강한 확신을 가지기보다는, 오히려 당신 안에서 더욱 더 견고히 서는 것이었나이다. 나는 권면을 받기 위해, 노인이며 신앙이 깊은 심플리키아누스는 신앙의 경험과 지식이 풍부하다는 인상을 나는 받았고, 실제로 그는 그러한 사람이었나이다. 나는 명예나 돈에 대한 욕망은 어느정도 타오르지 않게 되었나이다. 그러나 여자에 대한 사랑만큼은 든든한 쇠사슬처럼 나를 꽁꽁 묶어 두고 있었나이다.
심플리키아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신앙의 아버지였는데, 그는 빅토리누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나이다. 빅토리누스도 오랜 세월 동안 땅이 진동할 정도로 열변을 토하며 그러한 우상숭배를 옹호하였나이다. 그러던 그가 당신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세례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으니, 겸손의 멍에 앞에 목덜미를 숙이고 십자가의 능욕 앞에 이마를 조아렸나이다. 그리고 심플리키아누스의 권고로 용기를 내어 교회를 출석하는 기독교 신자가 되었나이다.
잃어버린 은전이야기나, 길 잃은 양의 이야기를 낭독할 때면, 당신의 집인 천국에서 베풀어질 기쁨의 잔치를 생각하고 눈물이 쏟아지나이다. 하오면 좋아하는 것을 항상 소유하고 있는 것 보다 그것을 다시 찾거나 되돌려 받을 때, 더 큰 기쁨을 영혼에 느끼는 것은 어찜이니이까? 큰 고통이 있은 연후에 큰 즐거움이 오는 것이 보편적 이치니이다. 당신은 결코 우리를 떠나가지 않으셨으나, 우리가 당신께 돌아가는 것은 참으로 어렵나이다.
빅토리 누스가 그의 혀를 무기 삼아 많은 사람들을 망친 일을 생각할 때, 당신의 자녀들은 당신께 큰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리지 않을 수 없었나이다. 이는 우리 임금이 “강한 자를 결박”(마 12:29)하신 일, 그 자의 세간을 늑탈하사 깨끗하게 하여 당신의 영광에 합당한 그릇으로 변화시킨 일, 곧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여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되게 하신 일을 당신의 자녀들이 보았음이니다. 그러므로 나는 심플리키아누스가 빅토리누스를 이야기 할 때, 나는 그를 본받을 마음이 불 일 듯이 일어났나이다. 그러나 아직 정욕에 종노릇함으로써 잘못된 습관이 생기고, 그 습관을 이기지 못함으로 인해 끊기 어려운 죄성이 형성됨이니이다. 이 쇠사슬은 꽁꽁 묶여 견디기 힘든 종살이를 하고 있었나이다. 그러므로 옛 의지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나이다. 이렇듯 나는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전에 내가 읽은 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갈 5:17) 거스른다는 말씀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나이다. 이것들은 나를 당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가도 그 생각을 계속 이어가지 못하게 했나이다.
하온데 어느 날 폰티키아누스라는 사람이 집으로 우리를 찾아왔는데, 그는 안토니우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나이다. 또한 밀라노의 성 밖에도 수도원이 있어, 암브로시우스의 돌봄을 받는 착한 수도사들로 가득하였으나, 우리는 그것도 몰랐나이다. 그리고 폰티기아누스의 친구가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기록한 책을 읽고 ‘숱한 위험을 무릅쓰고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 해도, 거기에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언제 그런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하나님의 측근이 되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가능하다네’라고 말하며 회심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폰티키아누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 자신을 바라보기 싫어, 나 자신을 내 등 뒤에 놓아두고 있었는데, 당신은 나를 거기서 끌어 내사 나의 면전에 세우시고 나 자신을 바라보게 하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내 기도를 빨리 들어주사, 영혼의 질병에서 고침을 받을까봐 두려워했나이다. 그리고 정욕을 충족시키는 것을 더 소원했으며, 사악한 미신을 믿으며, 종교에 대해 적의를 갖고 탐구했나이다. 그러나 폰티키아누스가 돌아간 다음에, 나는 내 자신 속으로 두려움 없이 돌아갔나이다.
나는 이때 얼굴과 마음 모두가 흥분에 휩싸였나이다. 내가 그처럼 미친 상태가 된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함이었으며, 내가 죽을 지경이 된 것은 살림을 받기 위함이었나이다.
하오나 영혼이 육신에 명령하면 즉시 순종하나이다. 하오나 영혼이 스스로에게 명령하면 반항하나이다. 영혼이 영혼더러 무슨 의지를 가지라 명령해도, 서로 같은 영혼이면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나이다. 명령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그 명령이 온전한 의지에 의한 명령이 아니기 때문이니이다. 만약 의지가 온전했다면 그러한 의지가 있으라는 명령을 내릴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니, 이는 그러한 의지가 이미 존재하는 까닭이니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의지가 있으니, 이 두 가지가 모두 온전치 못하여 어느 한 쪽에 결핍된 것이 다른 쪽에는 존재하는 것이니이다.
마니교도가 악한 본성과 선한 본성이 있다고 주장하나이다. 그러나 만약 자기들의 입장에서 ‘교회를 갈까, 아니면 극장으로 갈까’하는 의지는 선과 악의 상반된 의지가 아니니, 둘 다 마니교도가 볼 때에는 악한 본성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무슨 결심을 하려면, 그의 영혼은 하나로되 여러 의지로 인하여 망설이게 된다는 사실을 저들은 부인해서는 안 되나이다.
나는 어느 때보다도 나를 얽매고 있던 사슬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몸을 뒹굴기도 하고 뒤틀기도 하였나이다. 그렇다고 이전 상태로 다시 미끄러진 것은 아니었으니, 목표에 근접한 곳에 서서 다시 숨을 고르고 있었나이다. 그리하여 다시 시도하여 거리를 조금씩 좁혀 갔사오니, 거의 닿을 듯 거리는 가까워져 갔나이다.
이렇듯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해 내 영혼 은밀한 곳에 감추어져 있던 나의 모든 비참함이 드러나 내 심령의 눈앞에 쌓이게 되자, 거대한 폭풍우가 일어나 소낙비처럼 세찬 눈물을 쏟아 놓을 것만 같았나이다. 이 눈물은 당신이 받으실 만한 희생 제사이었나이다. 이 눈물 가운데 ‘집어, 읽어라! 집어, 읽어라!’라는 아이의 노랫소리에 내가 폈나이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키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바로 그 순간, 내 심령 속에 확신이 밝은 빛처럼 비쳐와 모든 의심의 구름이 다 사라져 버렸음이니이다. 결국 어머니의 소원은 어머니가 바라던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내 육신에서 태어난 손자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고 아름답게 이루어졌나이다.
제 9 권 세례를 받음
나는 진정 어떠한 자였나이까? 행위와 말과 의지 가운데 악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더이까? 하오나 주여, 당신은 선하시며 자비로우셔서 당신의 오른팔로 나를 죽음의 무저갱에서 구하시고, 내 심령 속 깊디깊은 연못에 괴인 엄청난 양의 썩은 물을 다 퍼서 없애 주셨나이다. 그리하여 내가 원하던 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고,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내가 원하게 된 것은 온전히 당신의 선물이었나이다.
그리하여 내가 그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것은 ‘주의 율법’, 당신의 평화를 즐거워하지 않는 소년들, 도리어 어리석음과 거짓과 법정 싸움만을 좋아하는 소년들이 광포를 발휘하는데 쓸 무기를 다시는 내 입에서 사들이지 못하게 함이었나이다. 더욱이 폐가 약해진 까닭에, 호흡이 곤란해지고 가슴에 통증이 있어 목이 쉬어 맑은 목소리를 낼 수가 없기도 하였나이다. 그래서 베레쿤두스가 제공한 카씨키아쿰의 농장에서 네브리디우스도 합류하여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나이다.
나는 나의 과거에 대해 분을 내어 떨었나이다. 그 분을 냄은 내 안에서 죄를 짓는 것이, 마니교도들의 주장처럼 어두움의 왕국에 속해 있는 다른 본성이 아니요, 바로 나 자신인 까닭이니이다. 마니교도는 자기 자신들에 대하여는 분 내어 떨지 않고,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실 그 날에 임할 진로를”(롬 2:5) 스스로 쌓고 있나이다. 우리는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요 1:9)이 아니고, 단지 “전에는 어두움”(엡 5:8)이던 우리가 당신의 조명을 받아 당신 안에서 빛이 되었을 따름이니이다.
교수직을 그만 둔 뒤로 나는 알뤼피우스와 나의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세례를 받았나이다. 아데오다투스의 재능은 많은 훌륭한 학자를 능가할 정도였나이다. 나는 세례를 받을 당시 인류 구원을 위한 당신의 구속경륜의 깊이를 묵상하는 기쁨을 맛보았는데, 그 놀라운 기쁨은 아무리 맛을 보아도 질리지 않았나이다.
밀라노 교회가 찬송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나이다. 이는 당시 소년 황제였던 발렌티니안의 모후 유스티나가 아리우스파라는 이단에 미혹된 까닭으로, 당신의 사람 암브로시우스를 핍박한 지, 일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음이니이다. 이때부터 찬송과 성가를 부르기 시작하였나이다. 이는 사람들이 괴로움으로 인해 지치지 않게 함이 그 목적이 었나이다. 또한 암브로시우스 감독을 통하여 프로타시우스와 게르바시우스의 유해가 숨겨져 있던 곳을 알려주셨는데, 이 유해를 모신 예배당에 치료의 기적이 일어나므로, 황태후 신분인 그 여자의 광기를 제어하는데 사용하였나이다.
어머니는 아프리카로 귀환하던 길에 티베르 강변의 오스티아에서 돌아가셨나이다. 어머니는 나를 육신으로는 시간의 빛 속에서 낳으셨고, 심령으로는 영원한 빛 속으로 태어나게 하셨나이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신앙심이 깊은 하녀의 열심 덕택임을 강조하였나이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틈엔가 자기도 모르게 술을 좋아하는 버릇이 들었다고 하나이다. 그러나 아첨하는 친구들은 우리를 그르치지만, 욕하는 원수들은 우리를 고쳐 줄 때가 많은 것처럼, 하녀의 비난으로 고쳐지게 되었나이다. 어머니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남편을 섬길 때 주를 섬기듯이 하였나이다. 그러므로 선량하나 불같은 성질의 남편을 올바르게 이끌어주는 아내의 역할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여인이었나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아니하셨나이다. 오직 우리가 당신의 제단 앞에 나아갈 때마다 어머니를 기억해 주는 것을 소망하셨나이다.
제 10 권 내적인 성찰
나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나도 주를 알기를 원하나이다. 그리하여 당신이 나를 붙들어 매시고, 내 영혼으로 들어오사 내 영혼을 당신의 소유가 되게 하소서. 당신을 의지하여 만족케하는 자가 되게 하여주소서. 이 고백은 육신의 음성으로 하지 아니하고, 영혼의 언어와 묵상이라는 외침으로 하오니, 당신의 귀에 다 들린바 되나이다.
저들의 귀가 나의 참된 자아가 있는 나의 심령 속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러하여 나의 나의 내면 가장 깊숙이 있는 것을 나의 고백을 통하여 듣기 원하는 것이니이다. 저들 안에 있는 사랑만이 저들로 하여금 나의 말을 믿게 할 것이니이다.
당신은 내 영혼 속에 물리적 공간으로는 붙들 수 없는 빛을 비추시고, 시간이 앗아갈 수 없는 음성을 등려주시며, 바람이 흩을 수 없는 향기를 뿜어 주시고, 또 맛있는 음식을 주시되 아무리 먹어도 줄어들지 않게 하시고, 껴안아 주시되 아무리 안겨 있어도 싫증나지 않게 하시나이다. 바로 이런 것이 내가 내 하나님을 사랑한다 할 때 사랑하는 것이니이다. 나는 이런 것이 무엇이냐고 모든 생물들에게, 지나가는 바람에게, 하늘과 해와 달과 별들에게, 나 자신에게, 끝으로 우주 전체를 향하여 물었나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나이다. 그리고 모두를 하나님이 만드셨음을 고백하였나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데는 기억이라는, 특히 감각적 기억이라는 힘이 작용을 하여야하나이다. 기억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갖가지 사물의 무수히 많은 영상이 간직되는 보고라, 망각으로 인해 삼킨바 또는 묻힌바 되지 않은 것을 맡아 보관하는 곳이라. 시각과 청각과 미각, 후각, 촉각의 관문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억이라는 거대하고도 은밀한 창고가 받아들여, 필요할 때는 다시 꺼내어 쓰는 것이니, 그 광활하고 비밀스러움은 말로 표현할 길 전혀 없도다. 그러나 그 영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누가 말해 줄 것이가?
이곳에서는 내가 나 자신도 만날 수 있으니, 내가 과거에,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이곳에서 되새겨 볼 수 있고, 당시 내가 그 행동을 할 때 어떠한 느낌을 가졌는지도 되돌아볼 수 있도다. 그러므로 나는 이들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을 서로 연결해 보기도 하고, 또 미래의 행동이나 사건, 희망과 연결시키기도 하도다.
하온데 내 기억의 용량은 엄청나게 커서, 비감각적인 것들도 간직할 수 있나이다. 이 비감각적인 것들은 자유학예를 통해 배운 것인데, 이것들은 잊어버리지 않는 한 감각적인 것들보다 더 깊숙한 곳에 따로 간직되니, 그곳은 ‘장소’라 말하기조차 어려운 장소로서, 그곳이 간직하는 것은 사물의 영상이 아니라 사물 자체니이다.
하온데 내가 듣기로 무릇 어떤 대상에 대해서든지 세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하나이다. 즉, 그것이 존재하는지,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떠한 성질의 것인지 하는 것이니이다. 이 질문의 올바른 판단기준은 기억 속에 현존하나이다. 또한 배우는데 있어서, 손 위에 놓아둔 듯할 때 비로소 그것을 배워 알게 되었다고 이를 수 있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절한 시간 간격마다 새롭게 해 두는 일을 소홀히 하면 이들이 다시 사라지는 품이, 마치 여러 깊숙한 밀실 속으로 흩어져 버리는 것 같이 하는 까닭에, 내가 이들을 다시 생각해 내려고 한다면, 같은 장소에서 다시 불러내와야 하나이다. 이는 이들이 달리 가 있을 자리가 없음이니이다. 즉 흩어져 있던 것은 거두어들여야만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이런 까닭에 사람들은 ‘생각함’을 ‘흩어져 있던 것을 모으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니이다.
대수학 및 기하학의 내용은 물체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서도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그것을 보고 인식하게 되나이다. 그러므로 영상과도 다르니이다.
또한 내 영혼이 느끼는 감정을 간직하는 것 역시 이 기억에서 오는 것이니, 영혼이 간정을 느낄 때 지니는 방식과는 아주 달라서, 기억력의 특성에 꼭 맞는 상태로 간직하나이다. 그리하여 과거의 슬펐던 일을 기억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회상하나이다. 이 감정의 기억은 감관의 문을 통하여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오직 영혼이 자신이 느꼈던 감정의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된 것을 기억이 수용한 것이니이다.
망각은 기억의 결핍을 의미하나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기억하는 것만을 기억 속에 간직하고, 망각한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망각’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도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니, 결국 망각도 기억 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니이다. 하오나 망각 자체가 기억 속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할 수 없고, 오직 잊어버리게만 할 수 있음이니, 그렇다면 망각의 영상만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이니이까?
기억 속에는 물체의 영상들을, 학예에 관한 내용들을, 영혼이 느끼는 감정과 같은 것으로 개념이나 마음에 새겨진 것의 형태로 존재하나이다. 그러나 당신을 찾는 나는 기억이라는 능력마저도 초월하여 당신을 잡으려하나이다.
어떤 사물, 특히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이 우리 시야에서는 사라졌지만 우리 기억 속에는 남아 있는 경우, 그 영상이 우리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까닭에, 그것이 우리 눈앞에 다시 나타날 때까지는 그것을 찾게 되나이다. 그러므로 기억 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은 시야에서 사라진다해도, 나중에 그것을 발견하게 될 때 알아볼 수 있나이다. 그러나 완전히 기억에서 사라진 것은 절대로 생각날 수 없을 것이나이다.
그렇다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어떠하나이까?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에 추구하는 것이 아니니이까? 또한 그들은 왜 행복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나이까? 이것 또한 기억에서 오는 것이 아니니이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행복 자체에 대한 기억이 그들에게 간직되어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것이니이다. 그런데 행복을 목표로 달려가는 도중에도 행복하여지는 것은 무었이나이까? 혹 행복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과정을 말함은 아니니이까? 그런데 사람들은 기쁨을 행복한 삶이라고 부르나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행복과 기쁨을 추구하나이다. 이 기쁨은 당신을 바라보며, 당신 까닭에 생기는 것이며 이것만이 참된 행복이니이다. 또 이 기쁨은 진리에서 오나이다. 진리를 아는 자는 행복한 자니이다.
아! 나는 진리를 발견한 그곳에서 진리 자체이신 나의 하나님을 발견하였고, 내가 발견한 진리를 잊어 본 적이 없나이다. 하온즉 내가 당신을 알게 된 때로부터 당신은 내 기억 안에 머물러 계셨나이다. 하오나 주여, 당신은 내 기억 어디에 계시나이까?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나 뵙고 알게 된 곳은 어디니이까? 그곳은 내 위에 게신 당신의 안이니이다. 그곳은 가시적인 장소가 아니니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기억함이니이다. 당신은 나를 큰 소리로 부르사, 나의 막힌 귀를 틔워 주셨나이다. 당신의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당신을 더욱 더 갈망하게 되었나이다. 당신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더욱 더 느끼게 되었나이다.
그러나 아직도 당신으로 충만하지 못하여 나는 통탄해야할 즐거움과 환영해야할 괴로움이 서로 다투고 있으니, 어느 쪽에 승리가 돌아갈지 나는 알 수 없나이다. 인내를 즐겨하여도 인내의 대상 그 자체를 사랑하는 자는 아무도 없나이다. 그러므로 인내의 대상이 없는 것을 더 좋아하나이다. 나는 불행할 때, 행복을 원하나, 행복할 때는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두려워하나이다. 인생의 행복에는 두 가지 화가 있는데, 불행에 대한 두려움과 세상의 즐거움에서 멸망의 싹이 돋아나는 까닭이니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시련은 연속이니이다.
그러므로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자비니이다. 무릇 당신과 함께 당신 이외의 다른 무엇을 사랑하되 그것을 당신 때문에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는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게 되나이다. 세상을 향하여 절제하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의 시련을 당신 안에서 물리치게 하소서.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나이다. 특히 꿈속에서는 나를 다스리던 이성은 간데없고 오직 유혹의 노예가 되나이다.
또한 식욕에서도 완전히 해방되지 못하였나이다. 진실로 건강을 위함인지, 욕심을 위함인지 분간할 수 없으니, 절제하기란 심히 어려운 일이니이다. 이 욕심은 음식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쾌락이 앞질러 가면 옳지 않음이니이다. 당신은 “과식과 술취함으로 너희 마음을 둔하게 하지 말라”, “너는 정욕을 좇지 말고 쾌락을 멀리하라”의 말씀으로 경고하시나이다. 그러나 필요라는 한계를 조금이라도 넘지 않는 자가 어디 있나이까?
좋은 냄새, 청각, 안목의 정욕, 호기심, 교만과 칭찬받고자 하는 욕심에서, 또한 헛된 영광을 무시하는 데서, 자기의 기분만을 생각하는데서, 오는 시험들은 인생의 시련의 연속을 보여주나이다. 우리는 칭찬받기를 원하나이다.
우리는 당신에게 올라가기를 원하나, 육을 입고 있는 우리는 다시 떨어져 고된 짐에 눌려버리나이다. 당신은 진리시니이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나이다. 하온데 나는 탐욕으로 인해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았으니, 당신과 함께 거짓도 동시에 소유하고자 하였나이다. 그러나 사단은 거짓된 중보자이니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중보자이시니이다. 그는 승리자시며, 희생제물이되셨나이다. 만약 희생제물이 되시지 않았다면 승리자도 없는 것일 것이니이다.
제 11 권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나의 이 고백은 결국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일깨우는데 있나이다. 내가 당신의 책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이나 다 당신께 고백하리니, 내가 거기서 ‘감사의 소리’를 듣고 당신이 주시는 잔을 마시기 원하나이다. 내가 또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기 원하오니, 곧 당신이 천지를 지으신 태초로부터 당신과 함께 영원히 다스리게 될 당신의 ‘거룩한 성’에 이르기까지니이다. 그러하니 당신의 종 모세에게 은혜를 베푸사, 진리를 말씀하게 하신 것같이, 나에게도 은혜를 베푸사 이 진리를 깨닫게 하소서!
“우리가 존재하게 된 것은 우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라, 그래서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 생성될 수 없었도다”라고 하나이다. 사람인 장인은 물체를 재료로 하여 물체를 만드나, 당신은 그렇지 않나이다. 당신은 천지를 결코 하늘에서나 땅에서 창조하지 않으셨고, 공중이나 물에서 창조하지 않으셨나이다. 당신은 또한 우주 속에서 우주를 창조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존재하는 것이 생성되기 전에는, 그것이 생성될 공간 자체가 없었음이니이다. 당신은 또한 천지를 구성하는 재료도 전혀 손에 지니지 않으셨나이다. 당신이 지니신 것 가운데 당신이 만들지 않으신 것은 전혀 있을 수 없으니, 당신이 무엇을 만드실 때 그 재료는 어디서 온 것이니이까? 당신은 영원한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나이다. 그 말씀은 사라 없어지는 시간적인 개념의 말이 아니니이다. 또한 당신의 로고스는 영원한 진리이시니이다. 그를 찾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진리 안에서 그를 만나게 하였나이다. 진리는 그러므로 ‘만물의 근원’인 태초이니이다. 아! 나는 이 진리의 빛으로 떨리니, 내가 이 빛과 다른 까닭이요, 내 마음이 불타오르는 것은 내가 이 빛을 닮았음이니이다.
영원과 시간은 비교할 수 없나이다. 긴 시간이 긴 시간이 되는 것은, 동시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수많은 사건의 흐름이 오래 계속되는 까닭이나, 영원에 있어서는 아무 것도 지나가지 않고, 모든 것이 다 현재적으로 존재하나이다. 반면 시간은 온전히 현재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니, 과거는 항상 미래에 의하여 밀려나고, 미래는 항상 과거를 뒤따르나이다. 하오나 과거와 미래는 영원한 현재로 존재하시는 분에 의해 창조되어 흐르는 것이 아니니이까?
그렇다면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창조 이전에 당신을 무엇을 하고 계셨나이까? 나는 감히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고 말하겠나이다. 당신은 모든 시간의 창조자시니 창조 이전에는 영원만 있었나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시간을 시간적으로 앞서신 것이 아니니, 당신을 모든 시간에 앞서신다고 하면 당신은 시간에 끝을 말함이며, 시간에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니, 당신의 영원성을 잃어버리게 되나이다.
시간은 영원하지 않나이다. 만약 시간이 영원하다면 과거와 미래는 있을 수 없나이다. 또한 시간을 길고 짧음으로 말할 수 없나니, 현존하는 시간에는 길이를 표시할 수없나이다. 혹 이런 표현을 쓰려면 길이를 표시하는 무엇이 존재해야하나이다. 주로 짧은 시간으로 긴 시간을 측정하나이다. ‘오래’라는 현상 자체도 시간의 연장이 있기에 가능하나이다. 또한 시간 속에 이 시간의 연장으로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나, 현재 속에서 존재하나이다.
더구나 시간은 천체의 운동이 아니니이다. 여호수아의 싸움에서 태양은 멈추었지만, 시간은 가고 있었음이니이다. 하온즉 내가 보기에는 시간이란 일종의 ‘연장’처럼 생각되나이다.
물체의 운동은 시간으로 측정하나이다. 그러나 물체가 운동하는 것과 그 물체가 운동한 시간을 측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니,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시간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나이까?
영혼은 시간을 기억과 감지와 예상을 가지고 재나이다. 즉 영혼은 예상한 것을 감지하고 감지한 것을 기억해 두는 것이니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시간이 길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예상이 길게 연장됨을 의미할 따름이다. 또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시간이 긴 것이 아니니, 과거의 시간이 길다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 길게 연장됨을 의미할 따름이다.
시간은 창조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시작에는 끝이 있을 수밖에 없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토록 모든 것을 알고 계시나이다.
제 12 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천지’의 뜻
당신은 아무 형상도 없는 무형의 질료를 만드시고, 그것을 재료로 하여 아름다운 피조세계를 만드셨으니, 이 질료라는 말 대신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다는 말이 사용되었다면, 내 어찌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리이까?
질료란 대체 무엇이니이까? 당신은 무형의 질료에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나이다. 그러하오나 당신이 창조하신 천지는 시간 이후의 천지를 말함이니이까? 아니면 시간 이전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니이까? 당신이 나와 대화를 나누어주소서.
나는 당신은 영원하시다는 것과 당신 이외의 모든 실체와 그 본성은 다신이 만드셨으나 당신과 다르며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니이다. 그러므로 당신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은 ‘무’와 잘못된 ‘의지’의 움직임뿐이니이다.
또한 시간 전에 창조된 것들은 깊음 위에 흑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함, 시간을 초월하면서도 당신 앞에 있는 영원하지 않는 존재가 있는데 바로 천사니이다.
제 13 권 창조주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
당신의 선하심은 나를 만드시기 이전부터, 아니 나를 만드실 때 사용하신 재료를 만드시기 이전부터 있었나이다. 당신은 실로 나를 필요로 하지 않으셨으며, 나는 당신께 도움이 될 만큼 선하지도 않나이다. 그러나 당신의 피조물은 모두 진실로 당신의 풍성한 선하심으로 인하여 존재를 부여받았으며, 선한 것이 되었나이다. 또한 우리를 만드신 당신은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 태초이신 아들, 수면에 운행하신 성령님이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나이다.
여기서 성령이 수면 위에 운행하신 것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생각하게 하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오는 열매, 은사들을 가지고 삶 속에 임하시는 성령님을 알게 되나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위로 올라가시니, 우리도 성령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이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존재와 지식과 의지를 갖고 계시니이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보게 되나이다.,,,결론(서평)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거스틴의 하나님을 향한 처절한 훈련 속에 성숙되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망나니의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에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는 그의 가난한 마음을 읽게 되었다. 삶에 대한 참된 목적을 찾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그에게 하나님은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다. 어쩜 이것까지도 하나님의 훈련의 각본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거스틴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지만, 나는 왜 그가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보다, 하나님이 어거스틴을 사랑하는 것이 더 강렬하게 전달되는 것일까? 그가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절실히 느끼게 된다.
나도 하나님께 그렇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일까? 나는 그처럼 위대하지도 깊은 신앙심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그처럼 사랑해 주실까? 나 또한 어거스틴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가기를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한다.
또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의구심과 감동을 적어보기로 한다.
12-11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한테, 악의 존재는 만드신 부분이 아니라 선의 상대적 존재로 스스로 생성된 것이라고 말함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창조사역에 역행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말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스스로 생성된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또한 하나님에게 나오지 않는 것은 ‘무와 잘못된 의지’라고 말하고 있는데,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무’조차도 하나님의 산물이 아니라면 그것의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더구나 ‘잘못된 의지’는 ‘선한 의지’와 반대되는 개념의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전자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성된 것이고 후자는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이 혼동을 가지고 온다.
4-15에서, 최고 악이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사단은 악이 아니라 악에 사로잡혀 있는 자인가? 사단과 악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지금껏 나는 사단이 곧 악이라고 생각을 해왔다. 만약 악과 사단이 다른 존재라면 악이 위인가? 아니면 사단이 위란 말인가?
4-16에서처럼, 나 또한 빛을 등지고 마치 내가 빛인 냥 나를 제외한 사람들을 비판하며 의식하는 삶을 살지는 않았는지 반성해보게 된다. 묵상 가운데, 등을 지고 있는 나를 연상하면 나는 진리를 보지 않은 채 반대쪽을 향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내가 진리의 빛이신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면 사람들을 의식하는 일은 없게 될 것이다. 오로지 주만 바라보는 삶은 세상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과 나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내가 누군가보다 뛰어난 능력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겸손을 갖춘 능력이 아니라면 오히려 백해무익할 것이다.
5-2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피하여, 기껏 도망하는 곳이 진노의 하나님과 대면하는 곳이라는 대목은 나의 눈에 눈물을 고이게 했다. 진노의 하나님을 만날지라도, 만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의 삶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다.
6-5에서, 나는 어거스틴이 너무도 부러웠다. 그는 적어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지는 않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오히려 신학교에 들어와서 의심하기 시작을 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깊은 혼돈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내 눈 앞에 증거를 제시하고, 기적을 체험케 하시는데도, 나는 끊임없이 그분의 존재를 놓고 괴로워했다.
7-5에서, 하나님에게는 필연만이 있다는 말이 너무도 멋있게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정말로 우연이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자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에게는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7-6에서, 나는 이부분에 사단이 충분히 인간에게 역사할 수 있다고 본다. 욥기서처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은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작용하는 것처럼 속임수를 쓸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악한 영향은 점성술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듣는 자들의 상태에 따라 틈을 탄다고 본다.
8-5에서 깨달은 것은 진실로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놓치는 일처럼 가장 슬픈 일은 없다는 것이다.
8-7에서 나는 거룩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거룩함 때문에 포기해야할 것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10-24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다면 구원은 없는 것일까? 나는 기억을 잃어버리고 살다가 죽는다면 그 사람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다.,,,.
제 8 권 회심을 위한 마지막 싸움
당신의 말씀은 이제 내 마음속 깊이 자리잡아, 나는 사방에서 당신으로 둘러쌈을 당하였나이다. 당신은 불멸의 실체시며, 다른 모든 실체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의심도 사라졌나이다. 그리하여 내가 당시 바랐던 것은 당신에 대하여 더욱 강한 확신을 가지기보다는, 오히려 당신 안에서 더욱 더 견고히 서는 것이었나이다. 나는 권면을 받기 위해, 노인이며 신앙이 깊은 심플리키아누스는 신앙의 경험과 지식이 풍부하다는 인상을 나는 받았고, 실제로 그는 그러한 사람이었나이다. 나는 명예나 돈에 대한 욕망은 어느정도 타오르지 않게 되었나이다. 그러나 여자에 대한 사랑만큼은 든든한 쇠사슬처럼 나를 꽁꽁 묶어 두고 있었나이다.
심플리키아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신앙의 아버지였는데, 그는 빅토리누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나이다. 빅토리누스도 오랜 세월 동안 땅이 진동할 정도로 열변을 토하며 그러한 우상숭배를 옹호하였나이다. 그러던 그가 당신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세례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으니, 겸손의 멍에 앞에 목덜미를 숙이고 십자가의 능욕 앞에 이마를 조아렸나이다. 그리고 심플리키아누스의 권고로 용기를 내어 교회를 출석하는 기독교 신자가 되었나이다.
잃어버린 은전이야기나, 길 잃은 양의 이야기를 낭독할 때면, 당신의 집인 천국에서 베풀어질 기쁨의 잔치를 생각하고 눈물이 쏟아지나이다. 하오면 좋아하는 것을 항상 소유하고 있는 것 보다 그것을 다시 찾거나 되돌려 받을 때, 더 큰 기쁨을 영혼에 느끼는 것은 어찜이니이까? 큰 고통이 있은 연후에 큰 즐거움이 오는 것이 보편적 이치니이다. 당신은 결코 우리를 떠나가지 않으셨으나, 우리가 당신께 돌아가는 것은 참으로 어렵나이다.
빅토리 누스가 그의 혀를 무기 삼아 많은 사람들을 망친 일을 생각할 때, 당신의 자녀들은 당신께 큰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리지 않을 수 없었나이다. 이는 우리 임금이 “강한 자를 결박”(마 12:29)하신 일, 그 자의 세간을 늑탈하사 깨끗하게 하여 당신의 영광에 합당한 그릇으로 변화시킨 일, 곧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여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되게 하신 일을 당신의 자녀들이 보았음이니다. 그러므로 나는 심플리키아누스가 빅토리누스를 이야기 할 때, 나는 그를 본받을 마음이 불 일 듯이 일어났나이다. 그러나 아직 정욕에 종노릇함으로써 잘못된 습관이 생기고, 그 습관을 이기지 못함으로 인해 끊기 어려운 죄성이 형성됨이니이다. 이 쇠사슬은 꽁꽁 묶여 견디기 힘든 종살이를 하고 있었나이다. 그러므로 옛 의지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나이다. 이렇듯 나는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전에 내가 읽은 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갈 5:17) 거스른다는 말씀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나이다. 이것들은 나를 당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가도 그 생각을 계속 이어가지 못하게 했나이다.
하온데 어느 날 폰티키아누스라는 사람이 집으로 우리를 찾아왔는데, 그는 안토니우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나이다. 또한 밀라노의 성 밖에도 수도원이 있어, 암브로시우스의 돌봄을 받는 착한 수도사들로 가득하였으나, 우리는 그것도 몰랐나이다. 그리고 폰티기아누스의 친구가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기록한 책을 읽고 ‘숱한 위험을 무릅쓰고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 해도, 거기에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언제 그런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하나님의 측근이 되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가능하다네’라고 말하며 회심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폰티키아누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 자신을 바라보기 싫어, 나 자신을 내 등 뒤에 놓아두고 있었는데, 당신은 나를 거기서 끌어 내사 나의 면전에 세우시고 나 자신을 바라보게 하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내 기도를 빨리 들어주사, 영혼의 질병에서 고침을 받을까봐 두려워했나이다. 그리고 정욕을 충족시키는 것을 더 소원했으며, 사악한 미신을 믿으며, 종교에 대해 적의를 갖고 탐구했나이다. 그러나 폰티키아누스가 돌아간 다음에, 나는 내 자신 속으로 두려움 없이 돌아갔나이다.
나는 이때 얼굴과 마음 모두가 흥분에 휩싸였나이다. 내가 그처럼 미친 상태가 된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함이었으며, 내가 죽을 지경이 된 것은 살림을 받기 위함이었나이다.
하오나 영혼이 육신에 명령하면 즉시 순종하나이다. 하오나 영혼이 스스로에게 명령하면 반항하나이다. 영혼이 영혼더러 무슨 의지를 가지라 명령해도, 서로 같은 영혼이면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나이다. 명령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그 명령이 온전한 의지에 의한 명령이 아니기 때문이니이다. 만약 의지가 온전했다면 그러한 의지가 있으라는 명령을 내릴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니, 이는 그러한 의지가 이미 존재하는 까닭이니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의지가 있으니, 이 두 가지가 모두 온전치 못하여 어느 한 쪽에 결핍된 것이 다른 쪽에는 존재하는 것이니이다.
마니교도가 악한 본성과 선한 본성이 있다고 주장하나이다. 그러나 만약 자기들의 입장에서 ‘교회를 갈까, 아니면 극장으로 갈까’하는 의지는 선과 악의 상반된 의지가 아니니, 둘 다 마니교도가 볼 때에는 악한 본성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무슨 결심을 하려면, 그의 영혼은 하나로되 여러 의지로 인하여 망설이게 된다는 사실을 저들은 부인해서는 안 되나이다.
나는 어느 때보다도 나를 얽매고 있던 사슬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몸을 뒹굴기도 하고 뒤틀기도 하였나이다. 그렇다고 이전 상태로 다시 미끄러진 것은 아니었으니, 목표에 근접한 곳에 서서 다시 숨을 고르고 있었나이다. 그리하여 다시 시도하여 거리를 조금씩 좁혀 갔사오니, 거의 닿을 듯 거리는 가까워져 갔나이다.
이렇듯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해 내 영혼 은밀한 곳에 감추어져 있던 나의 모든 비참함이 드러나 내 심령의 눈앞에 쌓이게 되자, 거대한 폭풍우가 일어나 소낙비처럼 세찬 눈물을 쏟아 놓을 것만 같았나이다. 이 눈물은 당신이 받으실 만한 희생 제사이었나이다. 이 눈물 가운데 ‘집어, 읽어라! 집어, 읽어라!’라는 아이의 노랫소리에 내가 폈나이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키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바로 그 순간, 내 심령 속에 확신이 밝은 빛처럼 비쳐와 모든 의심의 구름이 다 사라져 버렸음이니이다. 결국 어머니의 소원은 어머니가 바라던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내 육신에서 태어난 손자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고 아름답게 이루어졌나이다.
제 9 권 세례를 받음
나는 진정 어떠한 자였나이까? 행위와 말과 의지 가운데 악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더이까? 하오나 주여, 당신은 선하시며 자비로우셔서 당신의 오른팔로 나를 죽음의 무저갱에서 구하시고, 내 심령 속 깊디깊은 연못에 괴인 엄청난 양의 썩은 물을 다 퍼서 없애 주셨나이다. 그리하여 내가 원하던 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고,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내가 원하게 된 것은 온전히 당신의 선물이었나이다.
그리하여 내가 그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것은 ‘주의 율법’, 당신의 평화를 즐거워하지 않는 소년들, 도리어 어리석음과 거짓과 법정 싸움만을 좋아하는 소년들이 광포를 발휘하는데 쓸 무기를 다시는 내 입에서 사들이지 못하게 함이었나이다. 더욱이 폐가 약해진 까닭에, 호흡이 곤란해지고 가슴에 통증이 있어 목이 쉬어 맑은 목소리를 낼 수가 없기도 하였나이다. 그래서 베레쿤두스가 제공한 카씨키아쿰의 농장에서 네브리디우스도 합류하여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나이다.
나는 나의 과거에 대해 분을 내어 떨었나이다. 그 분을 냄은 내 안에서 죄를 짓는 것이, 마니교도들의 주장처럼 어두움의 왕국에 속해 있는 다른 본성이 아니요, 바로 나 자신인 까닭이니이다. 마니교도는 자기 자신들에 대하여는 분 내어 떨지 않고,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실 그 날에 임할 진로를”(롬 2:5) 스스로 쌓고 있나이다. 우리는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요 1:9)이 아니고, 단지 “전에는 어두움”(엡 5:8)이던 우리가 당신의 조명을 받아 당신 안에서 빛이 되었을 따름이니이다.
교수직을 그만 둔 뒤로 나는 알뤼피우스와 나의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세례를 받았나이다. 아데오다투스의 재능은 많은 훌륭한 학자를 능가할 정도였나이다. 나는 세례를 받을 당시 인류 구원을 위한 당신의 구속경륜의 깊이를 묵상하는 기쁨을 맛보았는데, 그 놀라운 기쁨은 아무리 맛을 보아도 질리지 않았나이다.
밀라노 교회가 찬송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나이다. 이는 당시 소년 황제였던 발렌티니안의 모후 유스티나가 아리우스파라는 이단에 미혹된 까닭으로, 당신의 사람 암브로시우스를 핍박한 지, 일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음이니이다. 이때부터 찬송과 성가를 부르기 시작하였나이다. 이는 사람들이 괴로움으로 인해 지치지 않게 함이 그 목적이 었나이다. 또한 암브로시우스 감독을 통하여 프로타시우스와 게르바시우스의 유해가 숨겨져 있던 곳을 알려주셨는데, 이 유해를 모신 예배당에 치료의 기적이 일어나므로, 황태후 신분인 그 여자의 광기를 제어하는데 사용하였나이다.
어머니는 아프리카로 귀환하던 길에 티베르 강변의 오스티아에서 돌아가셨나이다. 어머니는 나를 육신으로는 시간의 빛 속에서 낳으셨고, 심령으로는 영원한 빛 속으로 태어나게 하셨나이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신앙심이 깊은 하녀의 열심 덕택임을 강조하였나이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틈엔가 자기도 모르게 술을 좋아하는 버릇이 들었다고 하나이다. 그러나 아첨하는 친구들은 우리를 그르치지만, 욕하는 원수들은 우리를 고쳐 줄 때가 많은 것처럼, 하녀의 비난으로 고쳐지게 되었나이다. 어머니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남편을 섬길 때 주를 섬기듯이 하였나이다. 그러므로 선량하나 불같은 성질의 남편을 올바르게 이끌어주는 아내의 역할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여인이었나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아니하셨나이다. 오직 우리가 당신의 제단 앞에 나아갈 때마다 어머니를 기억해 주는 것을 소망하셨나이다.
제 10 권 내적인 성찰
나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나도 주를 알기를 원하나이다. 그리하여 당신이 나를 붙들어 매시고, 내 영혼으로 들어오사 내 영혼을 당신의 소유가 되게 하소서. 당신을 의지하여 만족케하는 자가 되게 하여주소서. 이 고백은 육신의 음성으로 하지 아니하고, 영혼의 언어와 묵상이라는 외침으로 하오니, 당신의 귀에 다 들린바 되나이다.
저들의 귀가 나의 참된 자아가 있는 나의 심령 속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러하여 나의 나의 내면 가장 깊숙이 있는 것을 나의 고백을 통하여 듣기 원하는 것이니이다. 저들 안에 있는 사랑만이 저들로 하여금 나의 말을 믿게 할 것이니이다.
당신은 내 영혼 속에 물리적 공간으로는 붙들 수 없는 빛을 비추시고, 시간이 앗아갈 수 없는 음성을 등려주시며, 바람이 흩을 수 없는 향기를 뿜어 주시고, 또 맛있는 음식을 주시되 아무리 먹어도 줄어들지 않게 하시고, 껴안아 주시되 아무리 안겨 있어도 싫증나지 않게 하시나이다. 바로 이런 것이 내가 내 하나님을 사랑한다 할 때 사랑하는 것이니이다. 나는 이런 것이 무엇이냐고 모든 생물들에게, 지나가는 바람에게, 하늘과 해와 달과 별들에게, 나 자신에게, 끝으로 우주 전체를 향하여 물었나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나이다. 그리고 모두를 하나님이 만드셨음을 고백하였나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데는 기억이라는, 특히 감각적 기억이라는 힘이 작용을 하여야하나이다. 기억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갖가지 사물의 무수히 많은 영상이 간직되는 보고라, 망각으로 인해 삼킨바 또는 묻힌바 되지 않은 것을 맡아 보관하는 곳이라. 시각과 청각과 미각, 후각, 촉각의 관문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억이라는 거대하고도 은밀한 창고가 받아들여, 필요할 때는 다시 꺼내어 쓰는 것이니, 그 광활하고 비밀스러움은 말로 표현할 길 전혀 없도다. 그러나 그 영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누가 말해 줄 것이가?
이곳에서는 내가 나 자신도 만날 수 있으니, 내가 과거에,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이곳에서 되새겨 볼 수 있고, 당시 내가 그 행동을 할 때 어떠한 느낌을 가졌는지도 되돌아볼 수 있도다. 그러므로 나는 이들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을 서로 연결해 보기도 하고, 또 미래의 행동이나 사건, 희망과 연결시키기도 하도다.
하온데 내 기억의 용량은 엄청나게 커서, 비감각적인 것들도 간직할 수 있나이다. 이 비감각적인 것들은 자유학예를 통해 배운 것인데, 이것들은 잊어버리지 않는 한 감각적인 것들보다 더 깊숙한 곳에 따로 간직되니, 그곳은 ‘장소’라 말하기조차 어려운 장소로서, 그곳이 간직하는 것은 사물의 영상이 아니라 사물 자체니이다.
하온데 내가 듣기로 무릇 어떤 대상에 대해서든지 세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하나이다. 즉, 그것이 존재하는지,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떠한 성질의 것인지 하는 것이니이다. 이 질문의 올바른 판단기준은 기억 속에 현존하나이다. 또한 배우는데 있어서, 손 위에 놓아둔 듯할 때 비로소 그것을 배워 알게 되었다고 이를 수 있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절한 시간 간격마다 새롭게 해 두는 일을 소홀히 하면 이들이 다시 사라지는 품이, 마치 여러 깊숙한 밀실 속으로 흩어져 버리는 것 같이 하는 까닭에, 내가 이들을 다시 생각해 내려고 한다면, 같은 장소에서 다시 불러내와야 하나이다. 이는 이들이 달리 가 있을 자리가 없음이니이다. 즉 흩어져 있던 것은 거두어들여야만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이런 까닭에 사람들은 ‘생각함’을 ‘흩어져 있던 것을 모으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니이다.
대수학 및 기하학의 내용은 물체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서도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그것을 보고 인식하게 되나이다. 그러므로 영상과도 다르니이다.
또한 내 영혼이 느끼는 감정을 간직하는 것 역시 이 기억에서 오는 것이니, 영혼이 간정을 느낄 때 지니는 방식과는 아주 달라서, 기억력의 특성에 꼭 맞는 상태로 간직하나이다. 그리하여 과거의 슬펐던 일을 기억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회상하나이다. 이 감정의 기억은 감관의 문을 통하여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오직 영혼이 자신이 느꼈던 감정의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된 것을 기억이 수용한 것이니이다.
망각은 기억의 결핍을 의미하나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기억하는 것만을 기억 속에 간직하고, 망각한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망각’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도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니, 결국 망각도 기억 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니이다. 하오나 망각 자체가 기억 속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할 수 없고, 오직 잊어버리게만 할 수 있음이니, 그렇다면 망각의 영상만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이니이까?
기억 속에는 물체의 영상들을, 학예에 관한 내용들을, 영혼이 느끼는 감정과 같은 것으로 개념이나 마음에 새겨진 것의 형태로 존재하나이다. 그러나 당신을 찾는 나는 기억이라는 능력마저도 초월하여 당신을 잡으려하나이다.
어떤 사물, 특히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이 우리 시야에서는 사라졌지만 우리 기억 속에는 남아 있는 경우, 그 영상이 우리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까닭에, 그것이 우리 눈앞에 다시 나타날 때까지는 그것을 찾게 되나이다. 그러므로 기억 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은 시야에서 사라진다해도, 나중에 그것을 발견하게 될 때 알아볼 수 있나이다. 그러나 완전히 기억에서 사라진 것은 절대로 생각날 수 없을 것이나이다.
그렇다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어떠하나이까?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에 추구하는 것이 아니니이까? 또한 그들은 왜 행복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나이까? 이것 또한 기억에서 오는 것이 아니니이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행복 자체에 대한 기억이 그들에게 간직되어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것이니이다. 그런데 행복을 목표로 달려가는 도중에도 행복하여지는 것은 무었이나이까? 혹 행복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과정을 말함은 아니니이까? 그런데 사람들은 기쁨을 행복한 삶이라고 부르나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행복과 기쁨을 추구하나이다. 이 기쁨은 당신을 바라보며, 당신 까닭에 생기는 것이며 이것만이 참된 행복이니이다. 또 이 기쁨은 진리에서 오나이다. 진리를 아는 자는 행복한 자니이다.
아! 나는 진리를 발견한 그곳에서 진리 자체이신 나의 하나님을 발견하였고, 내가 발견한 진리를 잊어 본 적이 없나이다. 하온즉 내가 당신을 알게 된 때로부터 당신은 내 기억 안에 머물러 계셨나이다. 하오나 주여, 당신은 내 기억 어디에 계시나이까?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나 뵙고 알게 된 곳은 어디니이까? 그곳은 내 위에 게신 당신의 안이니이다. 그곳은 가시적인 장소가 아니니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기억함이니이다. 당신은 나를 큰 소리로 부르사, 나의 막힌 귀를 틔워 주셨나이다. 당신의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당신을 더욱 더 갈망하게 되었나이다. 당신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더욱 더 느끼게 되었나이다.
그러나 아직도 당신으로 충만하지 못하여 나는 통탄해야할 즐거움과 환영해야할 괴로움이 서로 다투고 있으니, 어느 쪽에 승리가 돌아갈지 나는 알 수 없나이다. 인내를 즐겨하여도 인내의 대상 그 자체를 사랑하는 자는 아무도 없나이다. 그러므로 인내의 대상이 없는 것을 더 좋아하나이다. 나는 불행할 때, 행복을 원하나, 행복할 때는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두려워하나이다. 인생의 행복에는 두 가지 화가 있는데, 불행에 대한 두려움과 세상의 즐거움에서 멸망의 싹이 돋아나는 까닭이니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시련은 연속이니이다.
그러므로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자비니이다. 무릇 당신과 함께 당신 이외의 다른 무엇을 사랑하되 그것을 당신 때문에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는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게 되나이다. 세상을 향하여 절제하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의 시련을 당신 안에서 물리치게 하소서.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나이다. 특히 꿈속에서는 나를 다스리던 이성은 간데없고 오직 유혹의 노예가 되나이다.
또한 식욕에서도 완전히 해방되지 못하였나이다. 진실로 건강을 위함인지, 욕심을 위함인지 분간할 수 없으니, 절제하기란 심히 어려운 일이니이다. 이 욕심은 음식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쾌락이 앞질러 가면 옳지 않음이니이다. 당신은 “과식과 술취함으로 너희 마음을 둔하게 하지 말라”, “너는 정욕을 좇지 말고 쾌락을 멀리하라”의 말씀으로 경고하시나이다. 그러나 필요라는 한계를 조금이라도 넘지 않는 자가 어디 있나이까?
좋은 냄새, 청각, 안목의 정욕, 호기심, 교만과 칭찬받고자 하는 욕심에서, 또한 헛된 영광을 무시하는 데서, 자기의 기분만을 생각하는데서, 오는 시험들은 인생의 시련의 연속을 보여주나이다. 우리는 칭찬받기를 원하나이다.
우리는 당신에게 올라가기를 원하나, 육을 입고 있는 우리는 다시 떨어져 고된 짐에 눌려버리나이다. 당신은 진리시니이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나이다. 하온데 나는 탐욕으로 인해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았으니, 당신과 함께 거짓도 동시에 소유하고자 하였나이다. 그러나 사단은 거짓된 중보자이니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중보자이시니이다. 그는 승리자시며, 희생제물이되셨나이다. 만약 희생제물이 되시지 않았다면 승리자도 없는 것일 것이니이다.
제 11 권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나의 이 고백은 결국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일깨우는데 있나이다. 내가 당신의 책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이나 다 당신께 고백하리니, 내가 거기서 ‘감사의 소리’를 듣고 당신이 주시는 잔을 마시기 원하나이다. 내가 또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기 원하오니, 곧 당신이 천지를 지으신 태초로부터 당신과 함께 영원히 다스리게 될 당신의 ‘거룩한 성’에 이르기까지니이다. 그러하니 당신의 종 모세에게 은혜를 베푸사, 진리를 말씀하게 하신 것같이, 나에게도 은혜를 베푸사 이 진리를 깨닫게 하소서!
“우리가 존재하게 된 것은 우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라, 그래서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 생성될 수 없었도다”라고 하나이다. 사람인 장인은 물체를 재료로 하여 물체를 만드나, 당신은 그렇지 않나이다. 당신은 천지를 결코 하늘에서나 땅에서 창조하지 않으셨고, 공중이나 물에서 창조하지 않으셨나이다. 당신은 또한 우주 속에서 우주를 창조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존재하는 것이 생성되기 전에는, 그것이 생성될 공간 자체가 없었음이니이다. 당신은 또한 천지를 구성하는 재료도 전혀 손에 지니지 않으셨나이다. 당신이 지니신 것 가운데 당신이 만들지 않으신 것은 전혀 있을 수 없으니, 당신이 무엇을 만드실 때 그 재료는 어디서 온 것이니이까? 당신은 영원한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나이다. 그 말씀은 사라 없어지는 시간적인 개념의 말이 아니니이다. 또한 당신의 로고스는 영원한 진리이시니이다. 그를 찾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진리 안에서 그를 만나게 하였나이다. 진리는 그러므로 ‘만물의 근원’인 태초이니이다. 아! 나는 이 진리의 빛으로 떨리니, 내가 이 빛과 다른 까닭이요, 내 마음이 불타오르는 것은 내가 이 빛을 닮았음이니이다.
영원과 시간은 비교할 수 없나이다. 긴 시간이 긴 시간이 되는 것은, 동시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수많은 사건의 흐름이 오래 계속되는 까닭이나, 영원에 있어서는 아무 것도 지나가지 않고, 모든 것이 다 현재적으로 존재하나이다. 반면 시간은 온전히 현재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니, 과거는 항상 미래에 의하여 밀려나고, 미래는 항상 과거를 뒤따르나이다. 하오나 과거와 미래는 영원한 현재로 존재하시는 분에 의해 창조되어 흐르는 것이 아니니이까?
그렇다면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창조 이전에 당신을 무엇을 하고 계셨나이까? 나는 감히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고 말하겠나이다. 당신은 모든 시간의 창조자시니 창조 이전에는 영원만 있었나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시간을 시간적으로 앞서신 것이 아니니, 당신을 모든 시간에 앞서신다고 하면 당신은 시간에 끝을 말함이며, 시간에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니, 당신의 영원성을 잃어버리게 되나이다.
시간은 영원하지 않나이다. 만약 시간이 영원하다면 과거와 미래는 있을 수 없나이다. 또한 시간을 길고 짧음으로 말할 수 없나니, 현존하는 시간에는 길이를 표시할 수없나이다. 혹 이런 표현을 쓰려면 길이를 표시하는 무엇이 존재해야하나이다. 주로 짧은 시간으로 긴 시간을 측정하나이다. ‘오래’라는 현상 자체도 시간의 연장이 있기에 가능하나이다. 또한 시간 속에 이 시간의 연장으로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나, 현재 속에서 존재하나이다.
더구나 시간은 천체의 운동이 아니니이다. 여호수아의 싸움에서 태양은 멈추었지만, 시간은 가고 있었음이니이다. 하온즉 내가 보기에는 시간이란 일종의 ‘연장’처럼 생각되나이다.
물체의 운동은 시간으로 측정하나이다. 그러나 물체가 운동하는 것과 그 물체가 운동한 시간을 측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니,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시간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나이까?
영혼은 시간을 기억과 감지와 예상을 가지고 재나이다. 즉 영혼은 예상한 것을 감지하고 감지한 것을 기억해 두는 것이니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시간이 길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예상이 길게 연장됨을 의미할 따름이다. 또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시간이 긴 것이 아니니, 과거의 시간이 길다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 길게 연장됨을 의미할 따름이다.
시간은 창조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시작에는 끝이 있을 수밖에 없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토록 모든 것을 알고 계시나이다.
제 12 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천지’의 뜻
당신은 아무 형상도 없는 무형의 질료를 만드시고, 그것을 재료로 하여 아름다운 피조세계를 만드셨으니, 이 질료라는 말 대신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다는 말이 사용되었다면, 내 어찌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리이까?
질료란 대체 무엇이니이까? 당신은 무형의 질료에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나이다. 그러하오나 당신이 창조하신 천지는 시간 이후의 천지를 말함이니이까? 아니면 시간 이전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니이까? 당신이 나와 대화를 나누어주소서.
나는 당신은 영원하시다는 것과 당신 이외의 모든 실체와 그 본성은 다신이 만드셨으나 당신과 다르며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니이다. 그러므로 당신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은 ‘무’와 잘못된 ‘의지’의 움직임뿐이니이다.
또한 시간 전에 창조된 것들은 깊음 위에 흑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함, 시간을 초월하면서도 당신 앞에 있는 영원하지 않는 존재가 있는데 바로 천사니이다.
제 13 권 창조주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
당신의 선하심은 나를 만드시기 이전부터, 아니 나를 만드실 때 사용하신 재료를 만드시기 이전부터 있었나이다. 당신은 실로 나를 필요로 하지 않으셨으며, 나는 당신께 도움이 될 만큼 선하지도 않나이다. 그러나 당신의 피조물은 모두 진실로 당신의 풍성한 선하심으로 인하여 존재를 부여받았으며, 선한 것이 되었나이다. 또한 우리를 만드신 당신은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 태초이신 아들, 수면에 운행하신 성령님이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나이다.
여기서 성령이 수면 위에 운행하신 것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생각하게 하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오는 열매, 은사들을 가지고 삶 속에 임하시는 성령님을 알게 되나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위로 올라가시니, 우리도 성령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이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존재와 지식과 의지를 갖고 계시니이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보게 되나이다.,,,결론(서평)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거스틴의 하나님을 향한 처절한 훈련 속에 성숙되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망나니의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에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는 그의 가난한 마음을 읽게 되었다. 삶에 대한 참된 목적을 찾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그에게 하나님은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다. 어쩜 이것까지도 하나님의 훈련의 각본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거스틴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지만, 나는 왜 그가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보다, 하나님이 어거스틴을 사랑하는 것이 더 강렬하게 전달되는 것일까? 그가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절실히 느끼게 된다.
나도 하나님께 그렇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일까? 나는 그처럼 위대하지도 깊은 신앙심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그처럼 사랑해 주실까? 나 또한 어거스틴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가기를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한다.
또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의구심과 감동을 적어보기로 한다.
12-11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한테, 악의 존재는 만드신 부분이 아니라 선의 상대적 존재로 스스로 생성된 것이라고 말함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창조사역에 역행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말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스스로 생성된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또한 하나님에게 나오지 않는 것은 ‘무와 잘못된 의지’라고 말하고 있는데,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무’조차도 하나님의 산물이 아니라면 그것의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더구나 ‘잘못된 의지’는 ‘선한 의지’와 반대되는 개념의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전자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성된 것이고 후자는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이 혼동을 가지고 온다.
4-15에서, 최고 악이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사단은 악이 아니라 악에 사로잡혀 있는 자인가? 사단과 악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지금껏 나는 사단이 곧 악이라고 생각을 해왔다. 만약 악과 사단이 다른 존재라면 악이 위인가? 아니면 사단이 위란 말인가?
4-16에서처럼, 나 또한 빛을 등지고 마치 내가 빛인 냥 나를 제외한 사람들을 비판하며 의식하는 삶을 살지는 않았는지 반성해보게 된다. 묵상 가운데, 등을 지고 있는 나를 연상하면 나는 진리를 보지 않은 채 반대쪽을 향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내가 진리의 빛이신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면 사람들을 의식하는 일은 없게 될 것이다. 오로지 주만 바라보는 삶은 세상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과 나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내가 누군가보다 뛰어난 능력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겸손을 갖춘 능력이 아니라면 오히려 백해무익할 것이다.
5-2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피하여, 기껏 도망하는 곳이 진노의 하나님과 대면하는 곳이라는 대목은 나의 눈에 눈물을 고이게 했다. 진노의 하나님을 만날지라도, 만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의 삶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다.
6-5에서, 나는 어거스틴이 너무도 부러웠다. 그는 적어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지는 않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오히려 신학교에 들어와서 의심하기 시작을 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깊은 혼돈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내 눈 앞에 증거를 제시하고, 기적을 체험케 하시는데도, 나는 끊임없이 그분의 존재를 놓고 괴로워했다.
7-5에서, 하나님에게는 필연만이 있다는 말이 너무도 멋있게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정말로 우연이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자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에게는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7-6에서, 나는 이부분에 사단이 충분히 인간에게 역사할 수 있다고 본다. 욥기서처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은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작용하는 것처럼 속임수를 쓸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악한 영향은 점성술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듣는 자들의 상태에 따라 틈을 탄다고 본다.
8-5에서 깨달은 것은 진실로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놓치는 일처럼 가장 슬픈 일은 없다는 것이다.
8-7에서 나는 거룩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거룩함 때문에 포기해야할 것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10-24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다면 구원은 없는 것일까? 나는 기억을 잃어버리고 살다가 죽는다면 그 사람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