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행복합니다

담임목사 독서보고서

오늘도 행복합니다

담임목사 0 2334 0
Who am I?
프롤로그_ 다섯 번째 생일

진짜 나로 살아가는 맛
기분 좋은 날
십자가
목욕탕에서 생긴 일
사랑
수술 이야기
나는 주바라기입니다
전쟁
가을 하늘
곤고한 날에는
진짜 나로 살아가는 맛
사토라레
사랑의 블랙홀
'지손 아이시테루요' 출판기념회
어머니의 글_ 나의 딸 이지선

다시 찾은 얼굴
오빠와의 싸움
할아버지의 귀향
하나님의 방법으로 용서하기
지선아 사랑해
미국 대사관에서
문득 예쁜 반지를 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
얼굴
간증에 대하여
엄마의 충격 고백
보통 아빠일 뿐이야
친구의 글_ 내 친구가 가르쳐준 '최선'

나는 꿈꾸고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유학길에 오르며
시애틀 라이프 보고서
심정 여사 티켓 사건
홀로서기
오빠와 나
블리치펜
밥해 먹으러 왔니
말이 너무 하고 싶었던 날
나의 얄팍함
기분이 완전 좋아버리는 금요일 밤
A Terrible Day
결국 자기 싸움이다
혼자서도 살 수 있을까
저는 요즘 변했습니다
가자! 보스턴으로
재활상담가의 꿈
함께하면 통합니다

에필로그_ 바닥에서 희망 찾기,,,․ 목욕탕에서 생긴 일
  2003년 어느 날 목욕탕에 갔지요. 쑥탕에 들어갈 때였지요. 탕 안의 어느 할머니께서 저를 보시자마자 “아이고…어쩌다 이렇게 많이 다쳤수… 고생 엄청 했겠어…그래도 이렇게 심한데 산 게 기적이네….” 끝없는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저는 대답 대신 살짝 웃어드렸습니다. 이어지는 할머니의 신기한 말씀. “아이고… 근데 얼굴은 안 다쳤나봐. 정말 다행이네, 다행이야. 어떻게 얼굴은 하나도 안 다쳤네!”
  사고 후 7개월 만에 집에 돌아와 쓴 글에 이런 기도가 있었지요.
  “거울보기 겁나는 얼굴, 10년 후에는 내가 사고 얘기를 꺼내면 ‘전혀 몰랐어요. 화상 당하셨었어요? 이 얼굴이?’라고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치유 받기를 소망해요 하나님.(2001년 3월 7일)
  아, 10년이라고 그랬는데…이게 무슨 일이에요! 물론 수증기가 꽉 차 있어서 잘 안 보이셨을 수 있지만, 저는 이날 할머니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응답해주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불과 2년 만에 응답해주신 하나님! 어떻게 감사를 안 할 수 있겠어요.

․ 수술 이야기
  열두 번째 수술을 받으러 미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클리블랜드 클리닉의 신경외과 의사 선생님이신 이정훈 장로님이 주바라기 홈페이지를 보시다가 제게 메일을 주셨고, 그렇게 생긴 인연으로 장로님께서 제가 성형외과 진료를 받아보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그 병원에서 한 가지 특이했던 것은 간호사들이 수술 환자가 들어오면 반갑게 인사를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고맙고 기분이 좋았답니다. 예전에 수술 받을 때면 늘 너무나 외로웠거든요. 겁에 질려 있을 환자에게 한번 건네는 미소가 얼마나 따뜻하고, 어렵지 않은 사랑의 표현인지 그곳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 분들은 잘 알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 수술 후에도 한국에서 다른 부분의 기능 회복을 위해 두 번의 수술을 더 받았습니다. 그간의 수술로 그래도 ‘쓸 만한 정도’로 기능이 회복되었고, 이제는 정말로 살 만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수술은 계획하지 않습니다. 지금보다 더 말도 안 되게 힘들었던 몸으로 시작해서인지, 지금의 제 모습이 감사하기만 합니다. 아프지 않고 가렵지 않은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 나는 주바라기입니다
  절망이란 녀석은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침입하는지 순식간에 온 마음과 생각을 가득 채워버립니다. 조금 전까지 은혜로, 사랑으로 보였던 일들마저도 모두 절망으로, 끝으로, 패배와 의심으로 둔갑시켜버립니다. 아마도 세상을 저버리는 이들은 바로 이런 절망의 순간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이들이겠지요. 절망이 무섭다고 했지요. 네. 무섭습니다.
  그런데 더 무섭고 강한 것은 그 절대 어둠 가운데 바늘구멍보다 더 작은 구멍으로 새어 들어오는 희망이라는 녀석입니다. 절망은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가려져서 어두워진 것일 뿐, 그래서 안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헬렌 켈러가 그랬습니다. 늘 햇살을 향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이 모습이, 이 삶이 바로 주바라기의 모습이겠지요. 희망의 위력은 어두운 눈을 뜨게 하고 지나온 길과 걸어갈 앞길을 똑바로 볼 수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희망 찾기에 눈이 밝은 주바라기입니다.

․ 전쟁
  나는 나를 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분이 그분의 생명을 값으로 주고 산 ‘나’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는, 내 삶에는 나 혼자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 순간의 전쟁터에서 나는 생명의 위대한 힘을 느낍니다. 힘겨운 싸움을 해나가는 나 자신에게, 또 그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인도하시는 내 안의 주님께, 오늘도 인사를 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 가을 하늘
  가을 하늘은 참 아름답습니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될 만큼 가슴 벅차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그 하늘을 올려다보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문득 2000년 가을 어느 날이 생각났습니다. 사고 후 한 달 남짓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이동침대를 타고 그 지옥 같은 화상 치료를 받으러 가던 길, 또 치료 받을 걱정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제게 친절한 치료사 오빠가 창가 쪽에 침대를 바짝 갖다 대고는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보라고 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하늘이었습니다. 눈이 부셨습니다. 두 달을 중환자실 천장의 형광등만 보며 지내던 저는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사실 눈에 고인 진물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예쁜 하늘빛인지 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저에게 하늘을 보여주고 싶다고 멈춰 서준 치료사 오빠가 고마웠습니다.
  오늘의 가을 하늘이 제 눈에 이토록 아름답게 보이는 건, 이토록 경이롭고 감격스러운 건, 바로 그 옛날의 눈물과 감사 때문이겠죠….
  살아있어서 감사한 오늘입니다.

․ 진짜 나로 살아가는 맛
  후배 홈페이지에서 옛날 사진을 한 장 봤습니다. 사진 속의 저는 대학교 3학년이었고, 예쁜 원피스 차림으로 후배와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사진 속의 제 모습이 새롭기도 하고 좀 놀랍기도 하고, 아무튼 기분이 묘했습니다. 마치 제가 사진 속의 저와 지금의 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인생을 사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이제 겨우 이 모습으로 5년을 살았을 뿐인데, 지금 모습에 이렇게까지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졌다니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분이 정말 이상합니다. 그 옛날의 모습이 그립지 않은 나 자신에 또 한 번 놀랍니다. 물론 분명 내 모습이기도 했던 나의 어린 시절과 대학 시절의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진다는 건 그리 유쾌한 일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가 느끼는 모든 감정과 제가 보이는 반응에 저의 진실한 느낌이 실려 있어서, ‘진짜 나로 살아가는 맛’을 알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지금의 나, 이지선으로 살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 사랑의 블랙홀
  영화를 보고 나서 몇 년이 흘러도 계속 기억 속에 남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겐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영화가 그런 영화 중 하나입니다. 주인공에게 매일 똑같은 ‘어제’가 반복됩니다. 주인공은 무조건 ‘어제’를 또 살아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내일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하는 오늘의 열심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루살이의 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내일이 있기에 오늘의 열심과 인내가 헛되지 않을 수 있겠지요.

다시 찾은 얼굴

․ 오빠와의 싸움
  미국 시애틀로 떠나기 얼마 전 어느 저녁에 오빠와 잠깐 다투었습니다. 사실 다투었다기보다는… 제가 장난을 치다가 결국 오빠의 심기를 건드려서 오빠가 화가 많이 났었습니다. 정말 제가 잘못한 일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돌아오신 엄마에게 그냥 얘기랍시고 싸움 얘기를 시작한 것이 결국 엄마까지 속상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제가 잘못해서 싸운 것이라고 얘기하던 중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엄마는 오빠한테 화를 내셨습니다.
  저는 중간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오빠랑 싸웠는데 엄마가 제 편을 들어주신 것은 난생처음이었습니다. 엄마는 “이런 동생이 씩씩하게 살아만 주는 것도 고맙지 어디다 대고 화를 냈느냐!”시며 오빠를 야단치셨습니다.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렇게까지 화를 내시는 엄마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왠지 저까지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사고 후 저 때문에 애간장을 다 녹이느라 빠졌던 체중도 이제는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엄마에게 저는 가슴 시린 딸인가 봅니다. 정말 잘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가족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저는 잘 살고 있지만, 엄마의 상처를 다 덮어 줄 만큼 저도 보란 듯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또 멋지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 밤이었습니다.

․ 하나님의 방법으로 용서하기
  2003년에 펴낸 저의 첫 책에 <용서>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 신호를 기다리며 정지해 있던 저희 차에 돌진해왔던 가해자인 음주 운전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중환자실에서 면회 시간에 아빠가 사고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얘기를 처음 듣고 저는 “그 가족들이 찾아오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씻어 용서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용서’라는 말을 쓸 자격이 있다면 말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한다고 그렇게 말해 주세요.”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온몸에 화상을 입고 붕대를 친친 감고, 이제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마음을 먹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런 제 입술과 마음에 ‘용서’라는 말을 담게 해주신 분은 분명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용서하는 마음은 용서를 받아야 하는 마음보다 행복합니다. 용서는 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큰 사람이 작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용서입니다. 내가 더 행복하고 큰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거시 용서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특권입니다. 용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용서하심대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는 특권을 행사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지선아 사랑해
  얼마 전 어느 교회 간증 후 잠깐 인사만 나누었던 어느 여자 분에게서 이메일이 한 통 왔습니다. ‘지선 씨는 내 삶의 모티브’라는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그분은 3년 전 저의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겼었던 수많은 전쟁을 똑같이 치르고 이제 막 퇴원하신 것 같았습니다. 간증 후 사람이 너무 많아 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두 팔 벌려 안아드리며 “화이팅!”이라고 외쳤지요. 그런데 기대하지 않았던 이메일에서 “소나기가 퍼붓는 길을 걷고 있는 나에게 커다란 우산이 되어주셨어요.”라는 부끄러운 인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정말 아닌데…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된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가슴에 간직한 제게 그 영원한 생명을 나눌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만나는 여러분들의 입술을 통해 저는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 고백을 듣습니다.

․ 문득 예쁜 반지를 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예쁜 반지를 하나 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살짝살짝 눈에 띄는 예쁜 반지. 왠지 내 손에 반지가 어울릴 것 같지 않아서 사지도 않을 테지만…. 아마 산다 해도 오래 끼지도 않을 테지만….
  제가 조금 더 예뻤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정말 나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언제인가부터 그렇게 기도합니다. 낫고 싶다고….
  예뻐지고 싶은 저의 마음은 꼭 지금의 제 모습 때문은 아닙니다. 저도 평범한 이십대의 아가씨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의 속마음을 아시고 가슴 아파하거나 걱정하실 것 같은 분들 때문에, 그분들에 대한 염려 때문에 제 솔직한 마음을 덮어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냥 그렇구나… 이지선도 예뻐지고 싶구나 하고 넘어가주시면 좋겠어요. 그냥 평범한 이십대 아가씨의 일기장을 본 것처럼 말입니다.

․ 얼굴
  한두 분이 “좋아졌다.”고 말씀해주실 때는 그냥 인사말인 줄 알았습니다. 우스갯소리로 “미국 물 먹어서 좋아지나.”하시는 분들도 있고요. 그런데 정말 농담도 인사말도 아닌 것 같더라구요. 제가 제 사진을 봐도 놀랍니다. 이제는 ‘사고 전-사고 후’를 비교하는 ‘비포-애프터’ 사진이 아니라 불과 2년 전의 얼굴과 지금을 비교하면서도 깜짝깜짝 놀랍니다.
  저보다 닷새 늦게 중환자실에 들어온 아이가 있었습니다. 서로 위로하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예쁜 간호사님은 착하고, 못생긴 간호사님은 못됐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아이도 저의 말에 동의 했습니다. 저는 그 아이와 이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내 얼굴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라고요. ‘새롭게 만들어진 우리의 얼굴은 이제 우리의 몫’이라고요.
  얼굴은 자신의 얼을 담는 그릇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 ‘얼’은 이렇게 변해버린 화상 피부에도 담을 수 있습니다. 그분이 숨겨두신 제 마음속 보물은 이제 화상 흉터로도 덮을 수 없는가 봅니다.


․ 보통 아빠일 뿐이야
  2005년 6월 저는 아주 특별한 자리에 초대되어 다녀왔습니다. 제가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푸르메재단이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세계보도사진전>의 후원단체여서, 귀빈 자격으로 오프닝 행사 테이프 커팅을 하러 간 것입니다.
  예쁜 도우미 분들이 가위가 가지런히 놓인 쟁반을 들고 와서는 한 사람씩 가위를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왼쪽부터 강지원 변호사님, 상명대 총장님, 신문사 사장님께 주시더니… 글쎄 저는 휙 건너뛰고는 제 다음에 서 계신 세계보도사진재단 사무총장님께 가위를 주시는 것 아니겠어요. 가위를 받으려고 내밀었던 손은 어찌나 민망하고 당황스럽던지…
  저를 너무 성급히 판단하고 지나치게 배려한 주최 측에게 불쾌하기도 하고, 이 짧은 손가락으로도 가위질을 할 수 있는지 제게 한 번쯤 물어봐주셨으면 될 일인데 싶어서 섭섭하기도 했습니다. 그 짧은 순간동안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오갔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엄마랑 얘기를 하다가 아빠에게 넋두리도 할 겸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고는 이내 다 잊어버리고 다음 볼 일을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나서 모르는 번호에서 전화가 한 통 온 것입니다. 제가 다녀왔던 <세계보도사진전> 개막식을 주관하신 총책임자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전화하셨는데 오늘 불쾌하셨다고요.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희는 나름대로 생각한다고 회의도 하고 준비한건데…” 그분이 너무 죄송해하셔서 제가 또 민망하기도 했습니다.
  아빠는 저와 통화가 끝나고 그 행사 관련 기사를 보시다가 우연히 전화번호가 눈에 띄기에 전화를 한번 해보셨답니다. 아빠가 눈물나게 고마워졌습니다. 전화를 끊고는 아빠한테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아빠, 열라 멋져!” 메시지를 받고 으쓱해지셨을 우리 아빠, 금세 답을 보내셨습니다. “보통 아빠일 뿐이야.”

 
 나는 꿈꾸고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 유학길에 오르며
  KBS <인간극장> 출연과 첫 번째 책 출간을 계기로 생각지도 않게 유명해지면서 바빠지는 바람에 몇 개월 미뤄졌던 유학을 2004년 3월 드디어 떠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드디어 ‘유학’이란 걸 가게 된 것입니다. 사고 나고 피부도 없는 몸으로 병원 침대에 누워서 정말 ‘꿈같은 꿈’을 꾸었는데… 이렇게 정말 가게 된 것입니다. 친구랑 심리학과 대학원 랭킹을 따져보던 기억, 캐나다인 선생님이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오셔서 우리말 발음도 제대로 안 되는 저와 영어 공부를 함께 해주시던 기억…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마 그때 병원에서 그런 저를 보고 제정신이 아니라고,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가엾다고 하셨을 분들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저를 위해서 싸우고 계심을. 저를 향해 폭포처럼 부으시는 그 사랑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대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할 수 있어서 기쁘고 감사합니다.


․ 시애틀 다이어리 03-기분이 완전 좋아버리는 금요일 밤
  2004년 10월 22일 금요일. 오늘 <듣기와 말하기> 시간에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뭔가를 설득하는 스피치를 하는 건데, 지난주 내내 그럴듯한 주제를 찾지 못해 언니들을 마구 괴롭히다가 월요일 수업 시간에 괜찮은 것이 번뜩 떠올랐다. 내가 다치기 전 장애인에 관해서 가졌던 편견과 오해를 바탕으로 내가 새롭게 느낀 것들을 얘기하면서 대부분의 편견과 오해가 사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얘기하기로 했다. 내 사진을 보여주면서 내 얘기를 살짝 꺼내는 걸로 시작해서 결론은 “당신들이 그동안 장애인을 동정했다면 이제 그러지 않기를 바라고 편견을 갖지 않기 바란다.”였다.
  사실… 나랑 같이 수업 듣는 애들이나 선생님이나 얼마나 궁금했겠는가…. ‘대체 쟤는 어쩌다 저렇게 됐을까?’ 그들과 나 사이에 뭔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했다. 나를 오픈시킬 계기가 필요했다. 이번 스피치를 그 계기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앞에 나가서 예전 사진들을 보여주며 스피치를 시작하는데…선생님이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애들도 다 놀라고, 갑자기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그래서 “너무 심각하게 듣지 마세요!”라고 말해주고 열심히 외운 내용을 들려주었다. 어찌나 경청을 하는지… 너무 열심히 들어서 조금 떨렸다. 흐흐. 스피치를 마치자 선생님이 “어메이징(amazing)"하다며 칭찬해 주셨다. <지선아 사랑해>의 일본어판 <지손 아이시테루요>도 가져갔는데 애들이 빌려달라고 줄을 섰다. 기분 좋다. 갑자기 뭔가 공부를 무지 열심히, 그리고 좀 더 적극적으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불끈불끈 들었다!

․ 저는 요즘 변했습니다
  저는 요즘 변했습니다. 2004년 미국에 와서, 다시 학교에 다니고, 또 난생처음 혼자 살면서 저는 많이 변했습니다. 변한 것들이 정말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감사한 변화는 저도 착실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이런 착실함이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라고 있습니다.
  사실 전에는 늘 걱정이었습니다. 난 착실하지 않은데… 성실하지도 못한데… 나의 이 불타는 열정만을 강조하여 교수님들 잔뜩 기대하시게 만들어놓고는 ‘알고 보니 전혀 착실하지 못한 이지선의 모습’을 보시게 되면…얼마나 실망하실까…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걱정이었고, 그보다 10개월도 아닌 10년 동안 공부를 하겠다고 태평양 건너 와 있는 저 자신이 더 걱정이었습니다.
  저를 착실한 사람으로…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사람처럼 저를 다시 빚어가시는 분이 계십니다. 토기장이이신 그분, 요즘의 저를 보시고 예쁘고 기특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손을 뻗어 “잘하고 있구나!”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는 그분의 손길을 느낍니다. 그 손길에서 느껴지는 사랑이 너무 좋아서 저는 더 착실하고 예쁜 지선이가 되려고 매일 매일 더 노력합니다.

․ 재활상담가의 꿈
  사고 후 병원에 있는 동안 많은 환자들이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 고통도 함께 겪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막연히 제가 몸의 장애와 마음의 장애로 고통 받는 이들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꿈꾸고 바랬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에서도 임상심리학에서 분리되어 나온 지 50년밖에 안 되는 신생 분야인 ‘재활상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2005년 가을 학기에 보스턴 대학교 재활상담 석사 과정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한 번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한 번도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르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잃어보고, 아파본 후에 알게 되었답니다. 눈물만이 눈물을 닦아줄 수 있고, 아픔만이 아픔을 안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제가 가진 목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손으로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손을 잡고 함께 새 일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또 앞으로 어떤 일들을 하게 하실지 저는 정말 기대가 됩니다.

․ 함께하면 통합니다
  밀알복지재단의 홍보대사로 위촉되면서 2005년 4월 26일 밀알콘서트에 다녀왔습니다. ‘장애인의 완전한 사회 통합’이라는 슬로건 아래 열린 콘서트였습니다.
  연주를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우리 장애인들이 모두, 이 아이들처럼 그저 자기의 선 자리, 자기 맡은 바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한 가지 못하는 것이 있고, 부족한 부분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단점이고 장애라는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내가 잘하는 것 한 가지, 그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장애인의 사회 통합은 그렇게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비장애인은 자기도 못하거나 모자란 것이 있음을 깨닫고, 장애인에게 그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고,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모두가 각자 자신이 가장 아름답게 낼 수 있는 소리를 내며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통합이겠지요.,,,이지선 1978년에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유아교육과를 졸업했다. 대학 4학년이던 2000년 7월 30일,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오빠와 함께 승용차로 귀가하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 55퍼센트에 3도 화상을 입었다. 한 음주 운전자가 낸 6중 추돌 사고였다. 응급실을 향해 달려가는 앰뷸런스 안에서 이지선의 곁을 지키던 오빠는 “살 가망이 없으니 동생에게 작별 인사라도 하라.”는 말을 듣는다. 4-5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중상 환자로 의사들마저 치료를 포기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7개월간의 입원, 11차례의 수술,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치료…. 3년여의 시간을 뒤로한 지금, 더 이상 예전의 곱던 얼굴은 찾아볼 수 없고 온몸에 화상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지만 이지선은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다. 남들은 몸이 힘든 만큼 마음도 고생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자신은 몸이 아픈 게 힘들었지, 마음은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고, 사고로 자신의 인생이 끝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때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이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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